한인교회의 중국선교 역사와 평가

송종록 목사 (대학선교, Ph.D)

올해는 한중수교 25주년이다. 지난 4반세기 동안 한중관계는 돈독하고 여러 분야에 엄청난 교류가 있어 왔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2016년 가을부터 한중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1992년 수교 이래 최악의 상태이다. 주된 원인은 사드(THADD) 건이다. 중국이 경제, 문화적으로 보복을 하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중국에서 사역 중인 한인 선교사들도 상당 수 추방을 당했다. 한중간 교역량은 떨어지고 왕래객도 급격히 줄고 있다. 대립이 고조되는 만큼 양국 간에 감정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문제는 윗선의 정치논리가 일반 백성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 안에서 한국인 그리고 한국 안에서 중국인이 눈치를 보며 어색해하고 있다. 얽히고설킨 동북아의 정세 속에 선교사역도 움츠러지고 있다. 앞으로 중국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이참에 우리는 지난날의 사역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자기 평가는 필수적이다. 시행착오 없는 더 낳은 미래를 기약하기 위해서이다.

일제치하 한인교회의 중국선교(1913-1957)

1912년 9월 1일 한국에는 처음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총대로는 외국목사 44인, 조선목사 52인, 장로 125인, 합221명이 모였다. 회장으로는 언더우드(Underwood)선교사, 부회장에는 부흥운동의 기수인 길선주 목사가 선출되었다. 이때 열린 총회에서 공자의 고향인 중국의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다. 1913년 한국교회는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를 최초로 타 문화권에 보냈다. 아쉽게도 이들은 4년 후인 1917년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철수하고 말았다. 하지만 1917년 방효원과 홍승한,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가 가서 전임자들의 사역을 계승 발전시켰다. 그들은 1942년까지 35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1,71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2개의 학교를 설립했다. 한편 한인으로서 중국선교의 대부 격인 방지일 목사가 부친인 방효원 선교사의 대를 이었다. 그는 1937부터1957년 8월까지 공산화 된 중국 땅에 홀로 남았었다. 그는 속죄와 구령의 복음으로 사역에 올인했으며 선교사로서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본이 되었다.

근대화 시기 한인교회의 중국선교(1958-1991)

이 시기는 침잠기라고 해야 맞다. 중국에는 1966-1976년까지 문화 대혁명이 일어났다. 이 때 기독교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있었다. 약 150만 명의 무고한 백성이 희생된 것이다. 중국은 1978년 등소평이 복권되면서부터 개혁개방을 하기 시작했다. 미, 중은 1979년 1월 1일을 기해 대사급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이는 가난하고 힘없던 중국이 '죽의 장막'을 걷어내고 세계무대에 등장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중국이 문호를 개방함으로서 한국계 미국인(Korean American)도 비즈니스나 여행 목적으로 한, 두 사람씩 들어가게 되었다. 그들은 비록 극히 소수였지만 신분을 감추고 선교의 터전을 닦았다. 한편 한국인은 중국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따라서 방송과 문서로 간접선교를 하였다. 특히 홍콩이나 마카오 등을 통해 성경이나 신앙서적 등을 화교들이나 서구인을 통해 전달하게 했다. 어떤 이들은 아예 홍콩이나 대만으로 가 사역을 하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중국을 향한 준비단계로서 체류하고 있었다. 대만은 중국선교를 향한 항공모함이라고 했다.

한중수교 이후 한인교회의 중국선교(1992-2017)

한중수교는 1992년 8월 24일 체결되었다. 이로서 수많은 선교 역군들이 봇물 터지듯 중국으로 갔다. 이유인즉, 그간 중국은 신비스럽게 가려져 있어 기대감이 컸다. 한국에서 가깝고 물가도 저렴했다. 그들 생김새와 문화도 우리와 비슷했다. 무엇보다 복음을 필요로 하는 엄청난 인구가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여러 교단과 선교단체들은 경쟁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아예 개인 자격으로 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로서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전체 한인 선교사의 1/5정도나 되었다. 이밖에 사업이나 관광목적으로 간 한인 크리스천들도 선교에 직간접으로 관여하였다. 초기에는 동북3성에 밀집해있던 조선족 동포를 중심으로 사역이 전개되었다. 이어서 북한선교, 주류인 한족선교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따라 이슬람권과 서남쪽에 밀집해있는 소수 민족, 티벳의 라마불교 권으로도 사역이 확장되었다. 이제는 중국 본토뿐만 아니라 동남 아시아권, 북미와 유럽의 화교들을 대상으로까지 선교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한인교회의 중국선교에 대한 평가

제1기 사역은 그야말로 개척기였다. 당시 한국은 한일합방으로 인하여 일제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경제나 문화적으로 중국에 선교사를 보낼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총회가 구성될 때부터 중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제 2기 사역은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갈 수 없기에 밖에서 방송과 문서 등으로 간접사역을 하였다. 대신 홍콩과 대만, 마카오 등에서 선교를 하며 중국선교를 향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제 3기 사역은 중국 전역으로 여러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졌다. 교회개척, 신학교 운영, 대학 캠퍼스 전도, 제자훈련 그리고 연변 과기대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복지사역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이(功) 큰 만큼 과(過)도 적지 아니했다. 좀 더 여유 있게 중국을 배워가며 섬기는 자세로 임했어야 했다. 과시적인 물량주의는 한인교회가 뿌린 큰 오점이었다. 예수 안에서 통일성보다 경쟁적 분파주의를 야기한 점도 있다. 팀 사역보다 각개전투식 선교는 우리의 한계성이었다. 또한 현지인들로 하여금 사역의 주체되게 하는 본색화(本色化) 작업도 미미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맺음 말

그간 한인교회의 중국선교는 어떠했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개인과 단체 그리고 한인 선교사역이란 집단적 평가를 받게 되어 있다. 언젠가 중국 역사가들로부터도 냉정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이미 어떤 부문을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이 왜 우리 선교사들을 추방하는가? 이 대답은 모택동 정권이 왜 서방 선교사들을 모조리 추방했는가와 맥을 같이 한다. 올해는 한중수교 25년째이다. 한인의 중국선교도 본격적으로는 25년째이다. 사드(THADD)로 인한 중국 국가적 감정이 노출된 지금 우리는 지나간 4반세기 선교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허물과 연약함을 십자가에 내려놓고 새로운 이상을 꿈꾸어야 한다. 앞으로 우리의 기도와 땀과 눈물 그리고 재물과 청춘이 헛되지 않도록! jrsong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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