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향한 예레미야의 눈물

송종록 목사 (대학선교, Ph.D)

태극기 집회에 가면 애국이고 촛불집회에 가면 종북인가? 촛불을 들으면 민주정의이고 태극기를 들으면 수구 꼴통인가? 조국 대한민국이 탄핵문제로 휘청거리고 있다. 벌써 국정이 혼선을 빚은 지 5개월째가 되었다. 백성들은 마치 원수처럼 두 갈레로 나뉘어 있다. 촛불 집회는 벌써 17차이다. 연인원 1,000만 명을 넘었다. 태극기 집회는 14차이다. 연인원 기백만 명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 엄동설한에 얼마나 비생산적인 국력낭비인가? 이러한 진영 대결은 시민뿐만 아니라 국회와 법원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대한미국 정부수립 후 이렇게 국론이 분열된 적이 있었던가? 문제는 앞으로이다. 헌재의 탄핵선고가 어떻게 결론이 나든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더구나 올해는 한국에 대선이 있다. 탄핵정국이 대선정국으로 이어지면서 정파 간 반목현상은 극에 달할 것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때이다. 1.1.3.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도 비슷했다. 당시 유대 나라도 내우외환(內憂外患) 가운데 있었다. 그는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바라보며 가슴 아픈 예언을 했다. 그의 탄원은 눈물의 외침이었다. 오늘 우리 이민자들도 예레미야처럼 깨어 선지적 나팔을 불며 민족과 국가를 품어야 한다. 우리 조국이 하루속히 정상으로 회복되도록!

1. 예레미야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베냐민 지파 영토인 아나돗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다. 그는 솔로몬에 의해 아나돗으로 추방당한(왕상2:26) 아비아달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예레미야 자신은 제사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그의 예언은 제사장적 용어가 풍부하다. 그의 신학도 제사장 신학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평생 독신이었다(16:1-2). 선지자로서 활동 시기는 유다 왕 요시야 13년(주전 627년경)부터 시드기야 11년(주전 586년) 말까지 약 41년간이다. 그는 앗수르의 몰락과 바벨론 제국의 발흥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유다의 마지막 네 왕들의 시대에 활동했으며 실제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도하기도 했다.

2. 예레미야의 조국

당시 유다는 이집트와 바벨론의 세력 확장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이 시기에 남조 유다는 주변 강국의 세력 판도에 따라 국운이 좌우될 정도로 나약했다. 따라서 유다의 여러 왕들은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를 오가며 살아남기 위한 작전을 벌였다. 사실 유다 멸망은 외세의 침입보다 내부 악행의 비중이 컸다. 그들의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백성들을 패역한 길로 인도하였다. 그들은 자기 배를 채우는데 급급했다. 유다 왕과 방백들과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대적했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멸망과 재앙이 문에 엎드러졌으니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였다. 그들은 선지자의 외침에 무관심, 무감각, 무반응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예레미야가 말할 때마다 그를 핍박하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통해 경고를 했으나 그들은 하늘의 소리에 귀를 닫고 있었다. 결국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처참히 명망당하고 말았다.

3. 예레미야의 활동

예레미야는 구약의 어느 선지자보다 고독하며 고난을 많이 당했다. 그는 자기 시대의 정치와 종교적 권세들에 저항했다. 그는 가감 없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그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달콤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반역적인 유다를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사랑했다. 그는 백성들의 죄를 자기의 죄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기에 우는 자가 되었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예레미야애가2:18). 그는 이방인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백성들의 유배 등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의 참 뜻이 무엇인지 일깨우고자 했다. 예레미야애가는 폐허로 버려진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부른 비탄과 통곡을 시이다.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그는 포로생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하나님께서 아직도 은혜의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외쳤다.

4. 대한민국의 위기

지금 대한민국은 참으로 답답한 가운데 있다. 중국에 치이고 일본에 속이 뒤집히며 미국의 트럼프 정권에 눈치 보느라 여념이 없다. 유다가 바벨론과 애굽의 틈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때를 연상케 한다. 머리 위로는 화로 불같은 북한이 내려다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밖보다 안이다. 민심은 두 쪽으로 나뉘고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나 있다. 듣기에도 섬뜩한 막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도처에 경고의 빨간 불이 깜박인다. 지난해까지 권력의 한 복판에 있던 실세들이 법의 심판대 앞에 서 있다. 한국에 경제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쇠고랑을 찼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여자 명문사학의 총장도 감옥에 있다. 회사에 사장이 하루만 없어도 표시가 난다. 헌데 대한민국의 국정 리더십은 표류한지 반년이 되어 간다. 과연 헌재의 탄핵 결정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인용인가 기각인가? 어떻게 답이 나든 정치적 소용돌이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신의 한 수가 필요하다.

5. 크리스천의 역할

우리 대한민국은 그래도 소망이 있다. 우리는 일제 36년의 압제, 6.25전쟁, IMF 등 지금과 견줄 수 없는 시련을 극복해왔다. 역사는 우연히 상등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더 낳은 미래를 위해 산고의 고통일 것이다. 아무리 앞이 안 보이고 사방이 막혀있다 해도 하늘은 열려있다. 따라서 3.1운동 때처럼 우리 크리스천들이 주도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께 눈물로 탄원해야 한다. 이는 힘으로나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신으로 되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용납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상 진보도 보수도 필요하다. 손등과 바닥은 뗄 수 없으며 하나이다. 우리는 한겨레 한민족이다. 나와 생각과 사상이 다르다고 적으로 몰수는 없다. 세상에 가장 우매한 일은 적을 직시하지 못하고 아군끼리 싸우는 것이다. 세상의 논리는 “너 죽고 나 살자”이다. 기독교의 사상은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세속 논리에 휩싸이면 안 된다. 우리의 논리는 성경이다.

맺음 말

피는 물보다 진하다. 사상은 피보다 진하다. 그러나 신앙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안을 열어 시대와 민족을 보아야 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낡은 이념의 틀에 갇혀 앞을 못 보는 것은 불행이다. 지금은 개인과 국가의 번영을 위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이 필요하다. 세상 어디에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슬기로운 자는 문제가 없기를 바라기보다 문제 시 그것에 휘말리지 않고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다. 생즉사사즉생(生則死 死則生)이 답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다. 이는 희생을 필요로 한다. 물은 희생을 상징한다. 흙 속으로 스며들어 새 생명을 낳는다. 진정 우리 크리스천들이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며 희생하고 있는가? 그 희생의 증표는 무엇인가? 예레미야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jrsong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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