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송종록 목사 (대학선교, Ph.D)

2016년 병신년( 丙申年)이 또 저물어 가고 있다. 우리는 금년 한 해를 우리는 어떻게 보냈는가? 정말 뿌듯하고 행복한 날 들이었는가? 인간은 누구나 년 초가 되면 큰 포부와 각오로 시작한다. 그러나 세월의 덫 속에 어느 세 중심을 잃고 표류하곤 한다.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달려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다수의 사람들은 득의에 찬 승리보다 쓰라린 실패를 되씹게 된다. 인간의 연약성과 죄성 때문이리라. 세월은 야속하다. 가는 세월 잡을 수 없다. 세월에 대한 인간의 체감 속도는 인간의 나이에 반비례한다. 나이 들수록 화살처럼 지나간다. 우리는 흐르는 시간을 탓할 필요가 없다. 다만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며 새로운 다짐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엄위로우신 주님 앞에 서봐야 한다. 그것은 아픈 사연들을 시간의 강물에 띄워 보내는 것이다. 진정으로 참회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 해를 설계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인가? 비결은 시간의 실체를 알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다. 새 날들은 아직도 적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해 가야 한다. 승리의 비결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크로노스

크로노스(Χρόνος: Chronos)는 그리스 신화에서 보통 형태가 따로 없는 무형의 신이나 형태가 있는 경우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였다. 크로노스는 영어의 '크로니컬(chronicle: 연대기)', '크로날러지(chronology: 연대학)' 등 시간과 관계있는 단어들의 어원이 바로 이 크로노스에서 나왔다. 크로노스란 물리적 시간이다. 객관적 시간이다. 연대기적 시간이다. 자연적 시간이다. 이는 해가 뜨고 지면서 결정되는 시간이다. 매년 한 번씩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이에 동식물이 생기고 늙어 죽어가는 시간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보면 크로노스는 모든 것을 다 잡아 먹는 시간의 신으로 나온다. 그렇다. 모든 생물은 시간에 의해 잡아먹힘을 당한다. 정말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그래서 시편 90편에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간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시간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미모와 지식, 젊음과 물질, 명예와 체력 그리고 목숨까지이다. 크로노스 시간은 매우 냉정하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그래서 무섭다.

카이로스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 )는 그리스어로 '기회 (찬스)'를 의미하는 καιρός를 신격화한 남성 신이다. 원래는 '새긴다'라는 의미의 동사에 유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보면 카이로스의 모습은 앞머리는 길게 기르고 뒷머리는 맨들맨들한 대머리인데다 어깨와 발목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그 이유는 앞머리가 무성하여 사람들이 잘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카이로스가 지나가면 다시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려있는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카이로스 의미는 기회의 시간이다. 주관적 시간이다. 특별히 의미 있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러나 신속히 지나간다.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다. 인생은 어차피 기회의 연속이다. 여기 3종류 인생이 있다. 첫째는 카이로스적 기회가 오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우매하게 사는 경우이다. 둘째는 그 순간을 알게 되나 망설이다 놓치는 경우이다. 셋째는 늘 깨어 있어 순간순간의 기회를 자기 삶으로 포착하고 소화하는 경우이다. 우리 인생인 부요하게 되려면 생명이 없는 크로노스에서 의미가 부여되는 카이로스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두 종류 시간 개념의 차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개의 헬라어,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이해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객관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의미화한 시간을 뜻한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경과나 과정을 나타내는 수평적인(horizontal) 혹은 직선적인(linear)시간의 개념을 지닌 말이다. 이에 비해 "카이로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때나 기회(chance/moment/opportunity)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나타내는 수직적(vertical)인 의미를 지닌다. 시계 속의 시간으로서 정해진 시간에 얽매여서 시간에 끌려가는 삶의 방식이 크로노스라면 어느 한 가지에 몰두하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체험을 하게 되어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삶의 방식이 카이로스라 할 수 있다.

크리스천의 삶의 지혜

우리는 역사 속에서 무수한 부조리와 모순, 불의와 전쟁, 가난과 억압 등을 경험한다. 크로노스의 사람은 역사의 판단에 무심하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그때 일어난’ 교과서적인 사실에만 집착한다. 자본과 시류를 좇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모른다. 가장 원래적인 카이로스적 생명성이 소멸되고 크로노스적인 삶을 살고 있음이다. 역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이해하는 이에게 주어진다. 카이로스적 사람은 ‘그때 그 사실’보다도 ‘살아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선택한다. 그 정신이 곧 진실이며 구원의 수원지가 된다. 지금이 곧 과거이며 미래이기에 매 순간이 절실하고 푸르다. 그리스도인은 카이로스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다. 카이로스를 붙잡기 위해 크로노스를 과감히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이는 촌음을 아끼는 자이다. 주의 뜻이 분별하는 자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자이다(엡5:15-18). 그래서 주어진 시간을 기회로 여겨 의미 있는 시간을 창출해 내는 자이다. 크로노스를 카이로스적 시간으로 승화시켜 사용하면 그는 스스로의 위대한 가치를 실현하고 존재감을 얻게 된다.

맺음 말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우리가 무심코 살면 강물에 떠내려가는 낙엽처럼 된다. 세월의 노예가 된다는 말이다. 산다고 다 사는 것이 아니다. 사는 것처럼 살아야 사는 것이다. 하루 24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 하지만 삶의 가치로 따져볼 때 결과는 천대만상이다. 우리가 슬기로운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양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질적인 카이로스로 창출해 내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 버리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카이로스는 현재가 과거와 미래를 끌어안으며 상생하는 영원의 시간이다. 우리는 순간순간의 사건에 카이로스적 접근을 통해 제 생명의 의미를 펼쳐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일반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뚫고 와서 특별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았다. 비록 3년의 짧은 공생애였지만 주님은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인생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카이로스적 삶이 없는 인생은 무상하며 주름살만 더해갈 뿐이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으로서 자기 삶을 책임지게 되어 있다. 냉엄한 크로노스 시간 속에서 어떻게 카이로스적 인생을 살 것인가? 이는 각자의 몫이다. jrsong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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