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토양을 닦은 종교 개혁자들

송종록 목사 (대학선교, Ph.D)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양분할 수 있다. 이 종교개혁은 1500년의 초, 중세와 500년의 근, 현대 기독교 역사를 가르는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대표자는 루터와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이다.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의 행동적 주역이라면 칼빈은 사상적 주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쯔빙글리는 루터와 칼빈의 그늘에 서 있다. 그는 종교개혁의 셋째 인물 혹은 잊어진 종교개혁자라고 불리 운다. 아무튼 개신교(Protestant)는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Form이 아니라 Meaning을 강조했다. 이는 루터가 언급한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Sola Fide, Sola Scriptura, Sola Garcia)라는 말이 근간을 이룬다. 오늘의 교회는 개혁자들의 헌신과 도전 위에 서 있다. 이에 우리는 감사와 빚진 심정으로 개혁의 뿌리를 살피고 나아가 그 정신을 삶 속에 실현함이 마땅하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8년) 루터는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가 법률가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1501년에 에르푸르트대학(University of Erfurt)에 입학했다. 이 대학에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영향을 받았다. 1505년 그는 어느 날 폭풍우 가운데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은 사건을 경험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법관의 길을 포기했다. 그리고 수사가 되기 위해 1505년 7월에 수도원에 입문했다. 1512년 루터는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후에 성경연구와 강의를 하며 열 한개의 수도원을 관할하는 지역주교 대리 역할까지도 했다. 하지만 그 심령에는 마음의 평화가 없었다.

1516년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기간에 로마서 1장 17절 말씀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회심의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구원의 확신 속에 비로소 마음에 평화와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 내면의 갈등이 해결됨으로 그는 역사의식 속에서 교회의 죄악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는 1517년 10월 31일 로마가톨릭교회의 참람한 종교적 거짓과 부패에 맞서 ‘95개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문 앞에 게재하였다. 그날 밤, 이 회심의 도전장을 내걸고자 두드렸던 망치 소리는 천여 년 동안 어둠 속에 방치되었던 진리의 빗장을 여는 울림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교황청의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루터는 찰스 5세 황제에 의해 출두 명령을 받았다. 이에 그는 “보름스에 마귀가 지붕 위의 기왓장처럼 많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가겠다”고 하며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쳤다. 1521년 4월 18일 루터는 황제 앞에서 담대히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 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칼라일은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죽음을 무릎 쓰고 출두한 일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보름스 국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 장면을 인류의 근대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년) 쯔빙글리는 스위스 산간마을에서 10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베른에서 변증법을 배웠고 음악과 라티어 등의 인문주의 위주 지성교육을 받았다. 그는 35세 되던 1519년에 쮜리히로 옮겨 사제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1522년에는 페스트에 감염되어 수 주간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었다. 그는 이 때에 하나님의 긍휼과 위엄에 압도되었다. 그는 언변이 없고 시력도 좋지 않았으며 음성도 부드럽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지성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순 명료했으며 확신과 열정이 흘러넘쳤다.” 그는 그리스도의 삶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준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쯔빙글리는 루터와 동시대적 사람이었다. 그는 실제적인 성경 강해자였으며 루터보다 더 급진적인 종교 개혁자였다. 그는 신학적 문제에 있어 대부분 루터와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성찬 문제에 있어서 심한 견해 차이를 보아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 두 사람의 교제는 1529년에 파국에 이르렀고 교회의 연합은 깨어지고 말았다. 또한 그의 개혁은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그것은 루터의 정, 종 분리의 입장과 대조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개신교 신정 정치”(a Protestant Theocracy)의 이념을 내세웠다. 쮜리히 시는 차츰 선택받은 백성의 도시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는 거룩한 나라를 이룩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쮜리히 시는 1531년 10월 가톨릭 세력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쮜리히 군에 가담해서 싸우던 쯔빙글리는 수십 명의 설교자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년)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Gerard)는 노용시의 유력인사로서 판단력이 예리하고 지혜가 특출하였다. 칼빈은 어머니를 일찍 여읜 후, 아버지의 집을 떠나 귀족의 집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이후 그의 교육적인 배경은 크게 파리에서의 인문주의적 학예과정(StudiaHumantatis)과 오를레앙(Orlens) 및 부르쥬(Bourges) 대학 등에서 법학과정의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칼빈은 1532-34년초 사이에 회심을 경험했다. 이때부터 종교는 그 사상의 중심문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칼빈은 1536년까지 신학을 수학하면서 프랑스전역을 여행했다. 1533년경에 칼빈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며 종교개혁 운동에 합세했다. 그리고 1534년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을 때 불후의 저서인 ‘기독교 강요’(ChristianaeReligionisInstitutio) 초고를 완성했다.

개혁자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칼빈의 신학은 이후 윌리엄 캐리와 같은 개척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리처드 백스터, 존 번연, 요나단 에드워드, 조지 화이트필드, 이이작 뉴튼 경, 찰스 스펄전, 로버트 마펫, 아브라함 카이퍼,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위대한 부흥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1564년 5월 27일, 그의 나이 55세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제네바에 있는 그 무덤에는 지금도 이름이 없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너무 아쉬워 ‘J. C’라고 약자만 새겨 놓았다.

맺음 말

하나님의 역사에는 우연이란 없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당신의 택한 종들을 통해서 일을 하셨다. 여기 별 같이 빛나는 3사람의 종교 개혁자들이 있다. 마틴 루터의 신학적 유산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며 신자는 어떤 인간적인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고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인 권위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쯔빙글리의 개혁은 루터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그것은 말씀과 상관없는 잔재한 형식을 완전히 배격하는(reforming Lutheranism)이다. 존 칼빈은 루터에 의하여 시작된 종교개혁을 사상적으로 다듬고 체계화시켰다. 칼빈주의의 핵심은 다섯 솔라와 언약 신학 그리고 5대 강령이다. 지난 500년 우리 개신교회는 이들의 수고와 신학의 틀 위에서 성장해왔다. 만일 역사 가운데 그들이 없었다면 교회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제 우리는 부담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개혁자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계승 발전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jrsong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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