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록 목사 (대학선교, Ph.D)
일반적으로 중세교회사는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1천년의 시대를 가리킨다. 정확하게 말해서 로마제국의 어린 황제 로물루스가 오도바칼에 의해 폐위되어 로마제국이 붕괴된 476년부터 터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까지의 시대를 가리킨다. 기독교 역사상 중세는 영적인 암흑기였다. 그만큼 교회가 타락했다는 말이다. 특히 교황좌를 중심으로 한 정치싸움과 성직매매 등 교권이 극도로 부패 하였다. 기독교가 점점 세속화 되면서 신자의 생활과 불신자의 생활을 구별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 때에도 성령의 촛대는 사라지지 아니했다. 영적 계보는 세상과 대치되며 금욕적 삶을 추구하는 수도원을 통하여 이어졌다. 저명한 교황들과 교수들이 이 수도원을 통해 일어났다. 수도원은 중세교회가 타락하고 속화되었을 때 이를 정화하고 개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수도원은 중세 사람들의 정신생활이나 문화에 있어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세상 속에서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위기감이 팽배한 이때에 우리는 중세 수도원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수도원 운동의 출현 배경
기독교는 초기 로마제국의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세를 확장해갔다.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밀란의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후 집단적인 개종현상이 광범하게 일어났다. 자연히 교회의 영적 생명력은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과거 300년 동안 로마정부의 계속적인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군림하는 종교로 탈바꿈하자 교회는 무사 안일해졌다. 교회는 큰 재산의 소유하게 되었고 세속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경건하고 열성적인 신자나 성직자들은 교회의 세속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제국하의 교회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초기교회의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그들은 이 세상은 일시적인 것이요 덧없는 것(고전7:31)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성화를 위해 금욕생활을 강조하는 수도원적인 삶에서 해답을 찾았다. 여기 가장 대표되는 두 교단이 있었다.
도미니크(Dominic) 수도원
도미니크는 AD 1170-1221년대의 사람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칼라로가(Calaroga)에서 태어나 팔렌치아(Palencia)에서 수학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박학하였고 신앙이 독실하였으며 이단 배척에 관심이 컸다. 단테(Dante)는 말하기를 친구에게는 선하고 적에게는 두려운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그는 감독 디에고(Diego)의 천거로 모하멧 교도와 이단 무리를 교화하는데 열심을 냈다. 도미니크 교단은 프랜시스 교단과 마찬가지로 사치가 만연한 그 당시에 호화로운 옷을 벗어 던지고 낡은 옷을 걸치고 무소유 자로서 오로지 전도에 힘썼다. 그 정신은 걸식을 통한 청빈과 설교와 봉사를 통한 이웃사랑이었다. 이 수도단은 학문을 중시하였기에 고행보다는 연구를, 의식보다는 설교를 강조했다. 이런 영적인 맥락가운데 그들은 대학전도에 힘써 교수들 사이에 세력을 얻었다.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이 신학분야에 관심을 가졌다는데 있다. 그 당시 이단에 빠진 이들을 신학적으로 가르쳐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세의 스콜라 신학을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은 전적으로 도미니크 수도사들의 업적이었다. 그 중 가장 탁월한 인물이 스콜라 신학의 대가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이다.
프랜시스(Francis) 수도원
프랜시스는 AD 1182-1266년의 사람이다. 그는 앗시시(Assisi)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청년시절 중한 병을 앓게 되었고 인생의 공허감을 느끼던 터에 믿음을 갖게 되었다. 내면과 삶의 변화를 체험한 그는 자기일생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새롭게 변화된 그는 아버지의 포목상 창고의 물건을 팔아 다미안(Damian) 성당을 수리했다. 1208년 아시시에 있는 포르티웅교회에서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두 벌의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10:9-10)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준행하며 설교하고 다녔다. 가족과 이웃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보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더욱 열심을 냈다.
그의 사도적인 단순성과 가식 없는 온유한 인격 그리고 일생을 통한 뜨거운 사랑에 날아다니는 새까지도 그의 온기를 느끼고 날아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한 집단이 된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란 단지 봉사하기 위한 존재들로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며 겸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프란시스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작은 형제들’ 이라고 불렀다. 결국 이 무리들은 조직화된 수도원으로 성장해 갔고 교황의 승인을 받음으로 공인되었다. 프랜시스 수도원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청빈, 전도, 봉사에 전념하였다. 이 수도회는 일반대중들의 신앙이 수도회로 형성되어 나타난 유럽 고유의 민중 수도원이라 할 만하다. 프랜시스는 평민 속에 들어가서 사랑의 실천과 구원사업에 목표를 두었으므로 학문에 붙잡히는 것을 두려워하였으나 도미니크 수도원의 영향으로 후에 대학에도 들어가 전도하였다. 그리고 대학에서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두 수도원의 배출인물과 특성
중세의 수도원운동은 세속화, 비대화로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잃어가던 중세교회에 청량제 역할을 하였다. 이 두 수도원은 교회조직 밖에 있으면서 교회와 다르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허락을 받아 교단을 설립하였으며 때때로 교황의 지시를 받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13세기 유명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거의 탁발교단 출신이었다. 프랜시스교단 출신으로는 Hales의 Alexander, William of Okham, Bonaventura, Duns Scotus, Roger Bacon 등이었다. 그리고 도미니크교단 출신으로는 Albertus Magnus, Thomas Aquinas, Savonarola 등의 대학자들과 Eckhart, Tauler 등의 신비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본받아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자기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바쳤다. 또한 사람들에게 대대적인 전도운동을 일으켰으며 대학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함으로 많은 일군들을 배출하였다. 아무튼 이 수도원운동은 훗날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적 모태가 되었다. 도미니크 교단은 프랜시스 교단과 조직과 활동은 비슷하였으나 다른 점이 많았다. 도미니크 교단에는 그리스도의 병사(Militia Christi)모임이 있었다면 프랜시스 교단에는 참회하는 형제(Collegia Pogenitientium)가 있었다. 도미니크 교단은 처음부터 대학전도에 힘쓴 반면 프랜시스 교단은 주로 평민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전도하였다.
수도원 훈련의 원리
이에 대한 내용은 김명혁 교수께서 다음과 같이 잘 정리했다. 수도사의 지고선(至高善)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를 모방하므로 얻어지는 하나님 명상과 하나님 사랑의 ‘영적 완성’이었다. 수도사들은 막10:21의 말씀을 생활의 원리로 받아 들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좁은 길, 고난의 길, 자기 부정과 징벌의 길을 택하는 것을 의미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청결은 자신을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으로부터 청결케 하므로 얻어진다고 가르쳤다. 이와 같은 청결의 작업을 평생 계속하므로 영혼이 세상에 대해서는 가난해지고 하늘에 대해서는 부해져야 한다고 했다. ‘가난’(poverty)은 세상의 가치 기준을 부정하고 거절하는 표식이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풍부에 있지 않았다. 바질은 기록하기를 “어떤 사람이 무엇을 자기의 것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하나님과 먼 사람이다”라고 했다. 수도원의 규칙은 개인적 소유권을 철저하게 금했다. ‘순결’ (chastity)은 육체를 부정하고 거절하는 표식이었다. 가장 끈질긴 육체의 요구는 성적 요구였다. 제롬은 “결혼은 땅의 백성을 증가시키고 독신은 하늘의 백성을 증가시킨다”고 했다. ‘복종’(obedience)은 자기 의지(self-will)를 부정하고 거절하는 표식이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장과 선임자들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다. 교만은 죄악의 뿌리요 겸손은 선의 뿌리인데 순종은 겸손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맺음 말
우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이다. 항상 생명수가 솟아나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안정은 개혁이 수반되어야 한다. 안정과 개혁은 손 등과 바닥처럼 떨어질 수 없다. 중세교회는 외형상 위세를 떨쳤으나 사실은 성령의 기름 부의심이 사라졌다. 교회가 국가의 보호 아래 세속화로 치달을 때 이에 대한 반동으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박해 시의 교회가 순교를 미덕으로 삼았다면 평화 시의 교회는 이를 금욕으로 대치시킨 것이다.
금욕, 청빈, 전도, 봉사 등 이러한 가치는 시대와 환경을 초월한 성경의 영원한 원리이다. 중세 수도원을 통해 세상을 정화한 이 정신은 오늘 우리에게도 변함없이 요구된다. 교권과 탐욕과 허세와 맘몬이즘으로 물들어가는 21세기 교회에 걱정이 많다. 짐을 실은 수레가 내리막길을 달릴 때 가속도가 붙듯 우리는 문제를 알면서도 혁신하지 못하고 관성에 의해 굴러가는 점이 있다. 교회가 자정능력을 상실할 경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두렵기도 하다. 도미니크와 프랜시스 같은 신실한 주님의 종들이 여기저기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선도하며 새로운 영적 물결을 일으켜야 한다.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jrsong00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