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록 목사 (대학선교, Ph.D)
초대교회 이후 2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기독교사와 함께 신학도 많이 발전되어왔다. 그러나 아직도 여기저기서 이단성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선교 사상도 그 강조점이 각각 다르다. 지금도 이러할진대 교부들 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역사를 돌아봄은 미래의 거울이 된다. 교부(敎父)는 ‘교회의 아버지’란 뜻을 지니고 있다. 교부란 2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기독교 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이들을 일컫는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나가고 복음의 진리를 체계화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교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몇몇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첫째 전래의 교회에 관하여 저술을 써서 인용되는 자이다. 둘째 정통교리를 세운 자이다. 셋째 성스런 삶을 꾸린 자이다. 넷째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은 자이다.
폴리갑(Polycarp)
폴리갑은 AD 70-156년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요 이레니우스(Irenaeus)의 스승이었으며 후에 서머나(Smyrna)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헌신적이고도 열렬한 선교활동을 한 사람이었다. 그뿐이 아니고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하지 않고 정도를 걸어간 목회자였다. 서기 155년에 서머나에서는 아주 심한 기독교 박해가 집요하고도 갑작스럽게 일어났었다. 폴리갑도 결국에는 체포되었으며 협박을 받았다. 당시 서머나 지방에는 기독교를 믿는 자에게 화형에 처하는 법률이 있었다. 그 지방의 통치자는 평소 그를 존경하든 터라 살리고 싶은 마음으로 회유하기로 하였다. ‘단 한번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이든 하여도 상관 않겠다’고 강권하였으나 폴리갑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86년간 예수님은 나를 단 한 번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그 분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한 마디만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었는데도 그는 끝내 순교의 길을 택했다. 그는 피하라는 주위의 권고도 듣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에게 기도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결국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장작더미 위에 앉아서 장렬한 화형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은 기독교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순교사로 기록되고 있다. 진리를 따라 올곧은 신앙을 사수한 그는 기독지성인의 한 표상이 아닐 수 없다.
터툴리안(Turtulian)
터툴리안은 약 AD 155-230년 때의 사람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비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총독관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법률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을 40세 때에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 계기는 AD 195년에 크리스천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하는 모습에 감동받아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그는 초대교회의 교부이자, 평신도 신학자이다. 그는 법학, 수사학,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법률적인 사고를 신학에 적용하여 신학을 체계화시켰다. 터툴리안은 교회사 최초로 라틴어를 사용했는데 삼위일체 (Trinity)를 비롯한 982개의 라틴어 신학용어를 만들어냈다. 그의 라틴어 문체는 중세교회 라틴어의 표본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라틴신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를 대변한 변증가로서 역설적 표현을 즐겨 썼다. 저 유명한 명제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고 했다. 이밖에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무죄를 변증한다’ 등의 말을 남겼다. 그는 당대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제 1의 신학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명성이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순결과 거룩함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교회의 이러한 거룩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약속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처럼 터툴리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매우 명확하게 세상과 분리되어 지내는 것을 뜻하였다. 왜냐하면 세상은 구조적으로 마귀에 대한 우상숭배적인 봉사를 이미 갖추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리겐(Origen)
오리겐(Oregenes Adamantius)은 AD 185년부터 263년까지 살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오리게네스의 아버지 레오니데스가 202년의 박해 때 순교하자 오리게네스는 어머니와 6명의 남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는데 처음에는 귀부인의 집에서 살다가 그 뒤 문법을 가르쳐서 돈을 벌었으며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돈독한 신앙과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리 문답학교에 입학하여 클레멘트 밑에서 배웠다. 그는 신학교를 개설하고 후배 양성에 힘썼다. 그 역시 데시우스(Decius) 황제의 박해 때에 악형과 고문을 받고 두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순교하였다. 그는 한마디로 신학자이자 다작가였다. 그의 저서는 성경 주석류, 조직신학, 변증적 작품 등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27년에 걸쳐 저술한 “Hexapla”라는 성경이 있다. 이는 헬라어로 여섯 겹이라는 뜻인데 한쪽에 히브리 원문을 붙이고 그 옆에 헬라어를 비롯하여서 당시 주요한 6개의 언어를 비교하여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위대한 책은 아깝게도 유실되고 없다. 오리겐은 그 지성이 탁월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와 함께 교부로서 자격에 관한 시비가 있었다. 결국 그는 그 사상의 비정통성 까닭에 서방교회에서는 교부로서 거부되었으나 동방교회에서는 교부로 받아들여졌다.
성 어거스틴(Augustinus)
어거스틴은 354년 11월 13일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트(Thagast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파트리키우스(Patricius)란 이교도로서 존경받은 중류 가문에 속하였다. 모친 모니카(Monica)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역사 중 가장 훌륭한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지성과 영적 경건을 함께 갖춘 분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 부모는 교육을 중시하였기에 돈을 많이 써가며 인문교육도 시켰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지식욕에 불탔다. 19세 때 시세로(Cicero)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고 후에 진리탐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참된 행복이란 영적이며 그것은 철학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어거스틴은 지고선(supreme good)으로서 지혜를 찾는데 몰두했다. 이러한 변화를 어거스틴의 ‘첫 번째 개종’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시세로의 작품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책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기에 성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와 같이 수사학을 공부한 학도들에게 연구를 하면 할수록 실망을 주었다. 특히 구약성경의 비사실적인 내용과 단순한 문체는 잠시나마 그를 신앙에서 멀게 만들었다. 그는 방황가운데 마니교를 접했고 9년 동안 몸담았다. 그는 거기서 교도, 지도자, 학자 노릇을 했다. 그는 비록 도덕적으로 타락했지만 진리에 대한 탐구열은 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은 마치 바울의 다메섹 체험처럼 주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담 넘어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 ‘펴서 읽으라’라는 구절이 자기를 향한 주의 음성으로 여겨졌다. 그는 즉시 로마서 13:12 폈다. 그는 이 말씀에 은혜를 입고 완전히 개종한 후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다. 그는 ‘고백록’에서 말하기를 성경이 사실이고 영감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겸손하게 고백하였다.
이로써 그는 위대한 성자요 저술가이며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로서 새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의 역사철학은 중세를 지배했고 그의 은총교리는 종교개혁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결과적인 그의 업적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넘치는 학구열이다. 비록 한때 방황했다 할지라도 다시금 회심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된 사실 등은 우리에게 하나의 소망을 줄 수 있는 전형이다.
맺음 말
사도 이후 초대교회는 안 밖으로 시련에 봉착했다. 이단들의 득세와 외적인 핍박은 상상을 초월했다. 누군가 복음의 진리를 학문적으로 정립하고 체계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등장한 것이 교부들이다. 이들의 신학은 순수한 신앙의 바탕 위에서 외적 도전들에 대한 변호에서 시작되었다. 폴리캅은 고결한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열렬한 선교사상을 가진 자였다. 터툴리안은 법률가로서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였다. 오리겐은 신학자이자 다작가였다. 어거스틴은 위대한 성자요 저술가였다. 만일 초대교회에 이처럼 탁월한 교부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오늘 우리 교회에게 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먼저는 주님을 향한 올 곧은 신앙이다. 그들은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한 탁월한 지성이다. 그들은 이단들과 정면으로 맞섰으며 빛나는 지성으로 교리를 정립하였다. 한마디로 삶과 사역에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귀감이다.
오늘의 시대는 인본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다원주의 그리고 동성애 등으로 절대 신앙이 위협받고 있다. 교회가 순결성을 포기하고 급속히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사역자들 중 다수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행여 불이익을 당할까봐 진리를 외치지 못하고 있다. 풍요 속에 빈곤이다. 자유 속에 공허함이다. 초대교회 교부들 같은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때이다. 선교가 신학 사상 체계에서부터 다시 일어나야 한다. jrsong00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