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 선교전략 연구소)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어 왔다. 이중 가장 본이 되는 선교적 교회가 있다면 어디인가? 사도행전 13장에 언급되는 안디옥교회이다. 이 교회는 바울 선교의 중심지였다. 그곳은 1, 2, 3차 선교의 출발과 도착점이다. 본 교회가 탄생하기 전까지 복음은 지역적으로 팔레스틴 땅, 족속으로는 유대민족 그리고 사상적으로 시오니즘에 갇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을 통해 열방이 복을(창12:3)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륜을 거역하고 자기들끼리의 게토를 만들었다. 결국 하나님은 로마를 들어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했고 그들은 핍박에 못이겨 흩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이방에 처음 세워진 것이 안디옥교회이다. 안디옥교회는 세계선교의 베이스 켐프처럼 놀라운 선교적 과업을 수행했다. 만일 당시의 안디옥교회가 없었다면 기독교의 지형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안디옥교회가 어떻게 해서 Missional Church로서 역사의 족적을 남기게 되었는가? 오늘 우리 교회들은 그 특징을 본받아 땅 끝 선교에 진력해야 한다.
1. 성령의 인도함에 순복하는 교회 안디옥교회는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바나바는 구브로 태생인 레위 사람으로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되어 온 자이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아마도 흑인 개종자로 추측한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북아프리카에서 왔을 것이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왕족출신이다. 사울은 바리새인이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지이다. 중심인물 그 면면을 보면 출신성분이나 족속 그리고 자라온 배경들이 완전히 달랐다.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좋은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동역하기 힘든 여건이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았다. 오로지 ‘성령께서 불러 시키는 일’(행13:1)을 경청했으며 한 마음으로 순복했다.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다. 성령이다. 성령은 선교의 영이다. 오늘의 기독교회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순복하고 있는가? 만일 Yes라면, 왜 안디옥교회처럼 선교적 교회가 별로 보이지 않는가?
2. 금식과 기도로 올인 하는 교회 안디옥교회는 ‘주를 섬겸 금식하며 기도’(행13:2,3)를 했다. 그들은 왜 금식하며 기도했는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준행하기 위해서이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렘29:12). 금식의 의미는 집중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보통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 기도가 없으면 세속 충만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어렵다. 이슬람은 하루 5번씩 메카를 향해 절을 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들은 라마단 기간에 해가 있는 낮에는 식물을 입에 대지 않는다.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 한 달간이나 금식하며 생활하니 영적으로 독해지지 않을 수 없다. 유대교인들도 하루 3번씩 기도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은 어떠한가? 금식을 하며 결사의 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일 년에 몇 번이나 있는가? 다니엘처럼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자가 얼마나 될까? 우린 신앙생활 한다면서 너무 자유롭다. 자유 속에 책임을 망각하고 방종으로 흐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도하는 한 사람을 기도하지 않는 한 족속보다 강하다. 기도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무기이다. 기독교는 기도교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행함이 없이 관념론적인 신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생명공동체이다. 교회가 선교를 위해 안디옥 교회처럼 전투적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 첫걸음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3. 말씀을 먹고 가르치는 교회 안디옥교회는 말씀(행11:24-26)이 있었다. 말씀은 생명이다.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건강한 교회가 설 수 없다. 선교도 할 수 없다. 말씀은 인간의 삶과 사역의 원천이다. 정통파 유대인들의 중, 고교에서는 오전 내내 말씀을 공부하게 한다. 학생들은 학습시간에 토라와 탈무드를 서로 변증한다. 그들은 오후 시간에야 여타 일반과목을 공부한다. 그래도 아이비리그 대학에 다수가 들어간다. 노벨상 30%가 넘는다. 이러한 결과는 말씀이 지혜와 능력이라는 증거이다. 말씀에 취해 있을 때 세상이 침투하지 못한다. 안디옥교회가 힘이 있었던 것은 말씀을 취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Teaching is learning이다. 이렇게 말씀이 근간을 이루면 결코 흔들림이 없다. 선교도 말씀에서 발원한다. 이러므로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공론화 되었다. 그리스도인( a man in Christ)이란 주님께 속하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위해 사는 자이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은 말씀을 생명으로 취하고 있는가? 그 말씀을 깨닫는 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고 있는가?
4. 세계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교회 안디옥교회는 세계선교를 위해 온전히 헌신했다. 그 교회는 설립된 지 겨우 2년 밖에 되지 않았다. 더욱이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교회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기둥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 두 사람이 빠져 나가면 안디옥교회는 크나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기에 기꺼이 헌신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도 아픔을 감수하고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선교는 이렇듯 교회에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다. 다 쓰고 남은 것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깃털이 아니라 몸통으로 선교한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선교는 희생이다. 자기희생이 없는 곳에서는 새 생명이 잉태되지 않는다. 산모가 자기 몸을 부셔야 아기가 탄생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도 자기 생명으로 하셨다. 희생이 없는 곳에 성령의 역사도 없다. No Cross, No Crown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일 년에 여름 한철 단기선교로 될 일이 아니다. 교회가 한, 두 사람 파송하고 후원하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니다. 안디옥교회처럼 통째로 교회자체가 선교적으로 온전히 변해야 가능하다.
맺음 말
이스라엘에 가면 갈릴리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매일 600만 톤의 물을 요단강을 통해 사해에 보내준다. 사해는 매일 그렇게 많은 물을 받으면서도 한 방울도 다른 곳에 주지 않는다. 결과는 어떠한가? 사해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다. 물고기가 없다. 반면에 갈릴리 바다는 어떠한가? 더 더욱 생명수가 넘쳐난다. 물고기가 떼를 지어 다닌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안디옥교회는 세계선교를 위해 갈릴리 호수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것은 헌신이다. 헌신이란 90%가 아니라 100% 를 의미한다. 헌신을 하면 희생의 대가가 따른다. No Scar, No Star이다. 고난의 상처 없이 별처럼 빛날 수 없다.
오늘 우리 기독교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초대 안디옥교회처럼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며 희생하고 있는가? 과거 이스라엘처럼 자기 바벨탑과 유익만을 위해 게토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는가? 세상은 날로 강퍅해져가고 있다. 이제 교회가 세상을 향해 Missional Church로서 승부를 걸어야 할 때다. 그렇지 않고 관행처럼 적당한 헌신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05.14.2016
jrsong00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