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
세계적인 발명가인 에디슨은 일생동안 수많은 발명품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전등을 만들었고 전화를 발명했습니다. 그는 또 우리가 영화를 볼 때 필름을 돌려주는 영사기를 만들고 축음기를 만들었습니다. 요즘은 대부분 CD로 음악을 듣거나 컴퓨터를 통해 듣고 있지만 전에는 유성기라고 불렀던 전축을 통해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는데 바로 그 전축의 발명자가 에디슨이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문명의 기기들을 발명하여 우리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준 에디슨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무려 1093가지 종류의 발명품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발명품들을 만든 에디슨이 말하기를 “천재는 99%의 땀과 1%의 지능으로 태어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흔히 천재라고 하면 머리가 좋은 사람을 뜻하지만 이러한 천재들이라고 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타고난 천재라고 해도 정해진 목표를 향해 집중력을 가지고 끊임없는 열정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에디슨도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의 발명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그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연구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상에 수많은 발명품들을 내놓았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우리의 부모로부터 기독교적인 신앙을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는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참된 크리스천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도 역시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과연 어떠한 신앙인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교회에 나가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우울하고 슬픈 기색을 하고 불안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항상 근심과 염려에 쌓여서 도무지 기뻐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늘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기쁘게 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제 힘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제 뜻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더 의지하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어떤 농구선수가 시합에 임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 리바운드와 패스나 잘해주십시오. 슛은 제가 쏘겠습니다. 골인이 되면 그것은 화려한 제 솜씨 때문이고 만일 골인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의 패스나 리바운드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도움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도우려는 태도를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돕는 일에서 인생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패를 경험하게 되고 좌절하여 슬픔에 빠지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자신의 초라한 능력 때문에 불안하고 근심과 염려에 쌓여 지내다가 마침내는 영영 그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다가 멸망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비록 근심과 염려와 걱정이 많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 빌립보서 4장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 채 우리 삶의 문제들을 주님께 모두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근심과 염려를 잊고 불안이나 좌절, 그리고 실패도 겪지 않으며 늘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우리의 노력과 능력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는 실패가 있고 좌절에 빠질 수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때에는 결코 실패와 좌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에는 언제나 넘치는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는 심령에는 시대의 징조를 알며 자신의 상태를 깨달아 깨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것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향하신 우리 주님의 당부인 것입니다. 끈기 있게 부단히 드리는 기도는 꼭 어려울 때가 아니더라도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해야 할 신앙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드리는 기도야말로 우리들 자신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이봉주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예전에도 국제경기에서 마라톤 종목으로 우승을 했던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져서 성적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아니하고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결과 또다시 우승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운동선수들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실패와 좌절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도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의 훈련을 쌓아가야만 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집단적인 신앙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직접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나 가족의 믿음은 각자의 믿음이지 가족 전체의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믿는다고 해도 내가 교회에 안가거나 믿지 않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모가 권력가라도 그 자녀가 반드시 권력가가 아닐 수 있는 것처럼 부모의 신앙이 좋다고 내 신앙이 반드시 좋을 수 없으며 가족의 신앙이 좋다고 그 가족 구성원 전부가 다 같은 신앙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각자는 자신을 위한 신앙의 훈련을 쌓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도 바울이“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어느 특정한 일에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무슨 일에든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하고 좋은 일에만 감사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혹시라고 어렵고 힘든 상황이 되면 불평하고 원망하기가 일쑤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혀있는 암담한 상태에서도 오히려 벅찬 감격과 기쁨으로 감사의 찬송을 힘차게 불렀습니다. 감사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에는 결코 어떠한 단서나 조건이 붙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래전 일본의 유명한 사상가요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우찌무라 간조’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감사는 효과있는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중략)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감사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늘 불만투성이고 계속해서 원망을 늘어놓으며 언제나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에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감사하며 살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제대로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입으로는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제대로 감사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 아래에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시기를 “어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규례고 문둥병이 걸렸던 사람이 병이 다 낫게 되면 제사장에게 먼저 보이고 확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사장에게 보내신 것은 이미 그들의 병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고쳐주셨다고 하는 사실이 전제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시하신대로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제사장에게 가고 있었는데 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병이 다 나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고 나머지 아홉 사람은 자기들의 목적지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돌아온 한 사람만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에도 이와 같이 감사할 줄 모르고 자기 길로 가버린 아홉 명의 문둥병자와 같은 신앙인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긍휼히 여기셔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너무도 사랑하셔서 독생자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마침내 그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그 보혈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제대로 감사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감사할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너무나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아무런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어떤 대가를 기대하고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감사하는 표시를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받지 못했을 때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남을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제 갈길로 가버린 아홉 사람으로 인하여 서운함을 느끼셨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방을 물으셨다고도 짐작해 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원하시는 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그러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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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