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18:1-10
문성록 목사

(포코노한인장로교회)

“분수”라는 말, 이는 우리가 흔하게 쓰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분수’는 신자의 품성과 관련이 있으므로 예사로운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분수’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을 분별하는 슬기,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각자가 이를 수 있는 한계’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레위 자손을 책망하면서, “~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민 16:7)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렘 17:19~27절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는 주제의 말씀입니다. ‘안식일 성수’는 선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임에도 유다 조상들에 의해 훼손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유를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렘 17:23) 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를 벗어났다는 얘깁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이 안식일 성수를 원하셨다는 것과 더불어 그들에게 주실 복도 예비하였음을 보여줍니다(렘 17:24~26). 그리고 만약 그들이 안식일에 금한 일을 계속하기를 고집하고 안식일을 예사롭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렘 17:27).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렘 18:1, 2). 따라서 토기장이의 그릇 만드는 현장을 직접 보게 하였습니다. 거기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이상한 행동을 목격합니다. 토기장이가 정성을 다하여 만든 그릇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미련 없이 그 그릇을 부숴버리고 다시 그릇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을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무시하고,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외면하며, 하나님 대신 이방의 잡다한 신을 섬기는 등,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명예를 죄로 얼룩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의 소행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 그리고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신의 분수를 몰랐던 것입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이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1. 우리는 토기장이가 빚은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너는 거기에서 백성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받게 되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에 보내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녹로에서 일하는 토기장이를 보았습니다(3). 그리고 토기장이가 어떻게 녹로로 일하는지를 관찰하는 중에, 거기서 진흙 덩어리가 그의 손에서 터지면 즉각 그것을 다른 형태로 바꾸어 버렸는데, 이르기를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4) 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창 2:7), 빚어졌다는 것은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지은 바 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바로 이해하는 것, 곧 자신의 분수를 바르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습니다. 토기장이가 흙으로 질그릇을 만들듯이 말입니다. 

토기장이의 교훈은 이렇듯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인가를 잘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소중히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불행한 신분을 한탄하며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신의 처지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명예나 지위를 따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신분,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삶과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것이지, 가난하다는 것, 지위나 명예가 없으므로 주눅 들어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분수를 바르게 깨달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법도를 배워야 합니다. ‘천방지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리석게 어쩔 줄 모르고 덤비는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자기 분수도 모르는 사람,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도 모르고 날뛰는 사람을 보고 꼬집는 말입니다. 물론 질그릇은 좋은 그릇이 아닙니다. 값도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깨어지기 잘하는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큰소리칠 주제도 못 됩니다. 아옹다옹 싸울 일도 아닙니다. 나는 보잘것없는 질그릇이니까요. 주인의 눈 밖에 나면 쓸모없어 버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주인의 결정에 달린 운명이며, 이 운명은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라고 한 말씀이 주는 교훈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등급이 생깁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신분은 누구나 같고,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점도 같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오래 살다가 미국의 시민이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한국 사람이듯이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견에 좋은 대로 빚어진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2. 그 질그릇은 토기장이 손안에 있습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를 만드시고 사용하시는 일은 하나님께는 매우 쉬운 일입니다. 손을 한번 뒤집거나 녹로를 한번 돌림으로써 진흙의 형태는 아주 달라져서 그릇이 되기도 하고 아무런 형태를 보이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운명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렘 18: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그런데,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질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래된 얘기입니다. L.A에서 유학생으로 혼자 자취할 때 산 컵입니다. 나는 8년이 넘도록 사용한 하얀 색깔의 컵(Mug)이 있었습니다. 오래 쓰다 보니 상처가 나고, 안쪽은 얼룩이 졌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이 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그것에 대한 애착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본문을 묵상하는 중에 이빨 빠진 이 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컵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빨 빠지고 상처가 나고, 흉하게 되었는데도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인의 각별한 배려로 아직도 쓰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위인이 못된데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셨는데, 이는 쓸모가 있다거나 값진 것이기에 그리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베드로보다 더 나을 것 없고, 가롯인 유다보다 훌륭하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종보다 낫다고 자부할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존재가 ‘질그릇’이지만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질그릇’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이는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이 상처로 얼룩져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보잘것없는 질그릇이라도 하나님의 손안에서 우리는 안전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3. 토기장이는 그 질그릇의 상처를 압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중국의 토산품을 수집하는 사람이 중국의 토산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곳에 가서 도자기를 구경했습니다. 그는 예쁜 꽃병을 집어 들고,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던 도자기에 관한 지식을 동원하여 “이 꽃병은 굉장히 비싸겠는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전시장의 판매원은 “그것은 50센트면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렇게 싼 것이.”, “물론입니다. 애초에는 값나가는 물건을 만들려고 했는데 흠집이 생겼습니다.”, “내 눈엔 흠이 보이지 않는데요.”, “그러나 우리 주인은 그 흠이 어디 있는지 잘 압니다. 사실은 온전하지 못한 것은 내보내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예쁘잖아요.”

아무리 훌륭한 도자기라도 상처가 생기면 그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누구도 그 상처 난 것을 돈을 주고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주 싼 값에 팔리거나 아니면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범죄 함으로 상처투성이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본래의 가치를 잃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큰 약점을 지니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질병이었습니다. 행 22:19, 20 말씀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큰 상처요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바울의 상처를 다 알았고, 주님은 그런 사실을 아시면서도 그를 사도로 우뚝 세워 주셨습니다. 사람이 알면 놀림감이 되고, 주눅 들게 하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이 아시니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고쳐 주십니다. 성령님의 위로와 안식을, 그리고 영원한 평안을 주십니다.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빚어지는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필요하시면 다시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 드실 때까지 버리지 않고 몇 번이고 고쳐 만드실 것이기에 그 아픔도 견딜 수 있습니다. 만일 토기장이의 그릇이 한 가지 용도에 못 쓰게 된다면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흙으로 지으셨다(욥 33:6).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의 손안에 들어 있는 진흙이다(사 64:8). 우리의 주인 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흠이 어디 있는지를 잘 아십니다. 수많은 약점과 얼룩진 상처도 아십니다. 우리의 형편도 다 아십니다. 자! 주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더 열심히 삽시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앞에 나와서 진정한 평안과 승리의 기쁨을 누립시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 말씀의 큰 뜻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관한 말씀입니다. 질그릇이라고 다 같은 질그릇은 아닙니다. 토기장이의 손안에 있는 질그릇입니다. 따라서 토기장이는 그 질그릇의 상처와 아픔을 압니다. 하여 우리는 아무 염려 없습니다.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져 주실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질그릇이기에, 전능하신 토기장이의 손에 붙들려 삽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한 아무 염려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한없는 애정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에게 버림을 받아야 할 만큼의 상처가 있다고 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더 진하고 애틋하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그의 손안에 있기에 우리가 지금 안고 있는 파상의 아픔도 만져주시고, 수월하게 고쳐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paulmoon315@gmail.com

08.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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