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의 확신

요 17: 1-3
백운영 목사

(GP 선교회)

죽음의 문제는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줍니다. 히 9:27 보면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이미 정해진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한번 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해진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죽음엔 결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으며 모든 자에게 동일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죽음이란 말 대신에 우회적인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삶의 최후에 직면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죽음 이후 다가올 심판과 그 이후의 영생입니다. 영생의 기회는 이 땅에서 결정나기 때문에 죽고 나면 너무 늦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시간도 주시고 구원에 관한 충분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복음과 영생에 대한 약속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삶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중보 기도를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16장 마지막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떠날 것, 이제 너희에게 환란이 오고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라’고 권면합니다. 복음 때문에 교회가 당할 환란을 예비하라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고 그 승리는 교회를 위한 것이다. 바로 그 승리로 인하여 세상에서 환란 중에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겟세마네 기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기도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준 권능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영생을 받은 자들에게 어떤 확신이 주어졌는가를 확인시켜 주십니다. 두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 안에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 (2절)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에 관한 이야기는 이 세상의 주권을 누가 가졌는지를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 주권을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므로 예수 안에 있는 권세를 볼 수 없도록 하고 다른 그림으로 채워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세상을 보면서 세상에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둘째, 자신을 과신하게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으로 아담 때부터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지우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제가 깜짝 놀란 것은 한국 사회의 발전입니다. IT 강국이란 현실이 얼마나 실제로 다가왔는지 가는 곳마다 카메라로 감시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던 선교회에서 차를 빌려주어서 차를 몰고 이동하는데 주의를 주는 속도제한 카, 선 변경 카, 모든 신호등에 카, 주차장에도 전신 카로 카메라 공화국인 듯했습니다. 심지어는 강원도 산속에서 KWMC 준비 모임을 줌으로 진행하는데 뉴욕, LA, 시카고, DC 에서 접속한 분들보다 더 전파력이 강했습니다.

한국은 기계로 사는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무인 주유소, 무인 주차장, 보통 주차할 때 카메라 인식하고 카드로 결제합니다. 이렇게 기계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다 보면 사람 안 만나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살아가게 되어 삶이 좁아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점점 희박해지고 세상에 흠뻑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사탄이 하나님 지우는 전략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주권을 바꾸기 위해 한 일은 모든 초점을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죄 중의 죄로써 가장 심각한 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자신에게 세상에 집중하여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살라 하신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 자기 자신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만족에만 몰두하다 보면 하나님이 필요 없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조차 없어집니다. 기계 문명이 들어 오면서 세상은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인본주의 시작이 그렇습니다. 르네상스란 16세기 인간성 회복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으로 부흥, 재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여 인본주의 사상이 꽃을 피우게 되고 모든 예술에서 하나님을 배격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 극대화, 죄성이 극에 달했습니다. 종교 조차 자기만족과 자신의 성공만 추구하는 데 목적을 둔 것입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종교를 찾고있습니다. 교회조차 예배가 중심이 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곳을 기웃거립니다. 서구 교회가 죽어간 이유는 바로 인간 중심이 되어서 자기만족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예배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주권이 어디 있는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예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몰입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 때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자신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라는 마음으로 찬양하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제물입니다. 제물이란 드려져야 제맛이 납니다. 활활 태워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는 예배이며 바로 모든 권세를 잡고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예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당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 찬란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도취되어 내 문제가 더 이상 문제 같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될 때 마음에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성경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타협이 없는 성경의 핵심이고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이런 주권을 인정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그리스도를 아는것이다 (3절)

 

그리스도를 알면 그것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합니다. 요 8:31-3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그리스도를 알면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자녀들에게 자유란 무엇일까요?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하는 것, 술마시고 방탕하는 자유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유, 즉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 이 자유는 경험하지 못하면 내가 얼마나 죄성에 묶여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유를 맛보면 그 맛을 알게 되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이 나에게 보장한 자유는 죽음으로부터 자유, 이 땅의 권세, 이 세상에 속박된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 가치와 억압으로부터 자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죽음의 두려움으로 부터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영생이 불확실하면 신앙이 흔들리고 삶이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을 온전하게 받지 못하게 됩니다.

최근에 선교계는 아프리카 말라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말라위 정부 자신들의 국기에 태극 문양을 넣도록 국회에서 결정을 하는 중입니다. 그 시작은 한국선교사님들의 선한 영향력 행사입니다. 그 나라를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병원을 세우고 의료봉사, 대학을 설립. 후에 한국의 여러 기업이 농업 개발 사업을 진행. 한때 식량이 부족한 나라에서 농업 개발 사업을 가르치니까 이제 식량 문제 해결, 남는 곡식을 주변 국가에 수출. 그 일에 앞장선 사람들이 기업의 사장님들이고 그분들은 교회 장로님들 입니다. 오래전 조선에 같은 목적으로 왔던 선교사님들의 영생에 대한 확신과 뜨거운 가슴이 이제 한국 선교사들 역동적으로 복음으로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말라위는 희한한 사람들이 와서 영생의 복음만 아니라 식량 문제를 해결하니 그 희생과 사랑을 통해 삶의 태도가 바뀝니다. 이것은 복음이 들어간 나라의 전형적이 모습입니다. 영생에 뿌리를 내린 선한 능력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런 영향력을 행사하게 합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은 이런 귀한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고백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만 아니라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깨어나서 잘 때까지, 차를 타고 내릴 때,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시험을 앞두고, 그 어느 때나 모든 것을 기도로 시작할 수 있는 특권이 있으므로 하늘의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시작, 기도로 진행, 기도가 구체적으로 될 때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임할 것입니다.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말라 나는 네 하나님 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붇들리라” 다윗조차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삶에서 어려움에 봉착하고 두려움에서 떨 때 기도할 수 있으므로 모든 것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말씀으로 힘주시거나 사람을 보내 주시거나 환경을 바꿔 주시는 경험 하셨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붙잡고 계시기에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여 이손을 꼭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몸을,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이 찬양곡처럼 주님께서 꼭 잡은 손이 영생의 확신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gypack@hotmail.com

07.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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