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사랑의동산교회)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주님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셨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이다(요17:17).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시다(요14:6). 주님은 진리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러 오셨다. 그러나 진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진리에 관심이 없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이어서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진리에 대해 잠시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의 일생에 천국에 가장 가까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대답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본문 38절에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말했다. 재판장이 피의자에게서 죄를 발견할 수 없다면 즉시 무죄 방면해야 한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운 빌라도는 주저했고, 유월절 특사로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했지만 유대인들이 바라바를 택하므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서 매를 쳐서 피투성이가 된 피의자를 통해 사람들의 동정심을 끌어내려 했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 끌려나온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굶주린 사자들이 달려들어 물어뜯는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장면을 본 군중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까워하던가? 사자가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고 뼈를 부수며 살을 먹어치우는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던가? 지금도 투우장에서 투우사가 성난 소에 받혀 공중에 떠올랐다가 땅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아야 사람들이 흥분하고 소리 지르며 즐거워한다.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있는 인간의 사악성이다. 죄와 사망에 묶여있는 인간들의 참 모습인 것이다. 폭동을 일으킬 것 같은 유대 군중의 기세에 눌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무죄를 선언한 피의자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다.
본문에 기록된 내용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던 빌라도의 처지와 그의 잘못된 선택이 자신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의와 불의 중 의를 택하라
재판장이 피의자에게서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면 당연히 무죄를 선고했어야 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의와 불의 중 불의를 택하여 불의한 재판을 했다.
성도는 어떤 압력이나, 유혹이 있어도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남을 속여 얻는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다. 가난한 자에게 비싼 이자를 받는 것도 불의한 소득이고, 하나님의 소유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도 불의한 짓이다. 미워하는 것도, 성도 간에 송사하는 것도 불의한 행동이다. 고린도전서 6장 9절은 불의한 자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9).
이어서 다음절까지 구체적으로 불의한 죄가 무엇인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 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성 노릇하는 자나 동성애를 하는 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 진정 하나님나라를 원한다면 불의는 버리고 의를 택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둘째, 진리와 세상 것 중 진리를 택하라
빌라도는 진리를 듣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진리에 대해 잠시 관심은 기졌지만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겨 진리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메시아를 정죄하므로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진리를 알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진리를 모르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진리이신 주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얻지만 진리이신 주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지옥을 얻는다. 진리를 아는 것은 생사를 가르고 복과 저주를 결정짓는 시금석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서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진리를 들어도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 것들을 택한다. 진리를 버리고 세상 것만 택하는 자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가라지와 쭉정이일 뿐 구원백성이 아니다. 평생 천국 문 앞에서 늘 서성거리기만 할뿐 천국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진리를 택하고 진리를 사수하라.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의 온다는 말을 듣고 그들의 비난을 두려워한 나머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유대인들은 레위기 11장의 부정한 음식규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이런 음식규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으므로 베드로는 이방인 형제들과 음식친교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사도 바울은 진리를 훼손한 베드로의 외식을 지적하며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다.
갈라디아서 2장 14절 표준새번역본은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사람인데도 유대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사람더러 유대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바울의 행동은 개인감정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의로운 행동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진리를 바로 전하면 설교가 너무 세다느니, 율법적이라느니 하면서 듣기 싫어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설교를 선호한다. 그러나 진리는 양날 가진 검보다 더 예리하고 날카로워서 심령을 깨고 쪼개어 아픔과 고통을 주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영 혼 육이 고침 받고 새로워진다.
진리에 조미료를 섞어 듣기 좋은 설교의 유혹을 뿌리치라. 그런 혼합된 진리로는 한 영혼도 살리지 못한다. 빌립보 성의 루디아가 사도 바울이 전한 진리의 설교에 인생이 바뀌었고, 노예상인 존 뉴턴도 단 한 번의 말씀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말씀을 맡은 설교자들은 진리를 각색하고 윤색하여 쭉정이를 양산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사람과 하나님 중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빌라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다가 구세주를 십자가에 내주므로 천추의 한을 남겼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죄 없는 예수님을 무죄 석방했을 것이다. 지혜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우매자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설교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강단에 서야 한다. 진리를 진리대로 전하면 교인들이 떠날까봐 진리에 누룩을 섞어 듣기 좋은 말만 전하면 듣는 자들은 영적으로 죽는다.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교회에 사람들을 많이 모으지 못한 것에 대한 심판은 받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왜곡해 영혼들을 지옥에 떨어뜨린 불법의 죄는 무서운 심판을 받는다(마7:23).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두려워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에도 당국에서 금지했던 복음을 가감 없이 재판관들에게 전했다. 하나님 외에는 두려움의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넷째, 양심의 소리와 사람의 소리 중 양심의 소리를 택하라
빌라도가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세 번이나 말한 것은 양심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고 사람의 소리에 반응했다. 그가 물을 떠다가 손을 씻으며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한말(마27:24) 역시 양심의 소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양심의 소리를 억누르고 소란한 사람들 소리에 눌려 불의한 재판을 하고 말았다.
양심이 소리를 발하면 아무리 큰 이익이라도 포기하는 자가 되라. 이방인의 마음에는 본성에 도덕적 양심이 들어있고, 유대인의 양심에는 율법이 더 들어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양심에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믿음이 추가된다. 그러므로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각각 그 차원이 다르며,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죄가 된다.
양심의 소리를 거스르지 말라. 그것을 계속 거스르며 무시하면 양심의 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심하면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믿음도 파선시킨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서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마지막으로, 주 예수께 대못 박는 일을 중단하고 손에 있는 대못을 버리라
빌라도는 만민의 구원자이신 메시아를 만났고, 그분의 입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라는 말씀까지 들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을 못 박는 쪽을 택했다. 예수님은 만민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으시겠지만 빌라도는 굳이 메시아를 못 박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 악역을 맡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알고 은혜를 받은 자가 불순종을 일삼는 것을 말한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진리를 알았고 믿음을 선물로 받았으면 이제는 죄와 타락의 생활을 청산하고 의와 진리를 중심으로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이 고의로 죄를 짓는 것은 예수님을 대놓고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몹쓸 행위다.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며 회개해야 한다.
결론
예수님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죽음으로 만민의 죄를 속량하셔서 그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 빌라도는 의와 불의 중 불의를 택하고, 진리와 현실 가운데 현실을 택했으며, 양심의 소리와 사람의 소리 중 사람의 소리를 택하므로 죄 없는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천인공노할 죄를 지지르며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말았다.
당신이 진실로 믿는 자라면 항상 의를 택하고 진리를 택하는 삶을 살라.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사람의 소리를 따르지 말고 양심의 소리를 따르라. 또 한 가지, 불순종의 대못으로 주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파렴치한 짓은 그만 하라.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대못을 던져버리라. 믿음으로 받는 성도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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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