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의 눈물

사무엘상 1장1-11
이지용 목사

(뉴욕겟세마네교회)

한국의 강선영씨가 쓴 책 “눈물의 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세상에 나만큼 많이 운 사람이 있을까. 매일 밤마다 베개를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많이 울었다. 그 후 스무 해를 넘기면서 깨달았다. 눈물이 나를 살렸다는 것을. 지독한 우울증으로 심장이 썩어 들어가는 느낌으로 살았던 그때, 죽음의 유혹을 이기게 해준 것이 눈물의 힘이었다는 것을. 지난시절 흘렸던 많은 눈물로 인해 나는 죽음을 부르는 우울증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눈물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슬픔을 억눌러 놓지 않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한 가슴 아픈 사람들을 위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타적인 삶을 살다 가신 예수님도 우셨는데, 연약하고 슬픔 많은 우리가 울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쌓아두었기 때문에 마음속에 독이 가득하게 됩니다. 지독한 분노가 더욱 짙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울고, 나 때문에 가슴 아플 누군가를 위해 울고, 그리하면 눈물이 새로운 사랑을 불러일으켜 우리의 가슴을 환히 밝히게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라는 글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시84:6) 등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보면 아주 복잡한 가정, 문제가 많은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이라는 곳에 사는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이고, 부인은 한나입니다. 그런데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편 엘가나는 할 수 없이 브닌나라는 후처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아이를 잘 낳았습니다. 엘가나는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삼상 1:4~5).

한나는 비록 아이가 없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엘가나는 제물의 분깃을 나누어줄 때에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셔서 임신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를 남편이 갑절이나 사랑하는 것이 브닌나는 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이런 일이 한 번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매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무엘상 1장 7절에 보면,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 8절에 보면,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나의 상황이 되면, 당연히 울 수밖에 없을 텐데, 속상해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당연한데, 엘가나는 한나를 정말 이해를 못 한 것 같습니다. 한나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한나의 슬픔과 고통은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러 가지 괴로운 문제를 가지고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한나처럼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올바른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7장 5-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사람을 찾아가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계속 부탁하면, 사람들은 귀찮아합니다. 한 번 찾아와도 귀찮은데, 날마다 찾아와서 “이것 해결해주세요.”라고 부탁하면, 자식이 부탁하는 것이라도 귀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7-8절 보면, 어느 도시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하고 건방진 한 재판장이 있었는데,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그 재판장을 날마다 찾아가서 재판장에게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재판장이 얼마 동안은 과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너무 자주 찾아와서 졸라대니 재판장은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재판장이었지만, 과부가 “내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계속 졸라대니 귀찮아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시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8:7-8).

문제가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죽고 싶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다 보면 성령의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을 성령께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쓰십니다. 성령께서 귀하게 쓰십니다.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기뻐하시고, 큰 은혜를 받고, 큰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될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쓰십니다. 하나님만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서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장 12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나는 한두 번 짧게 기도한 것이 아니고, 오래 기도했습니다. 응답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가 간구한 대로 응답되지 않고,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별로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안 되게 하실 때에는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되면 더 잘되기 때문입니다. 안 되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세요. 

그런데 기도하다가 중간에 포기하지 마세요. 기도한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끈기 있게 계속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상 1장 10절에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나가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의미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호소할 때, 사람도 감동 받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눈물의 기도는 응답이 빠릅니다. 급한 일이 있어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 빨리 응답해주시지 않으시면,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빨리 응답됩니다.

시편 56편 8~9절에 보면,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이 눈물의 기도를 얼마나 많이 드렸는지,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눈물을 병에 담아놓고 눈물의 분량을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작정해놓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의 눈물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에 응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눈물의 분량이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작정해놓고 계십니다.

사무엘상 1장 11절에 보면,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무엘상 1장 17절에 보면, 엘리 제사장은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한나를 축복했습니다. 엘리는 늙었고, 몸이 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축복을 받은 한나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이 평안해졌다면, 이미 응답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생긴 증거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응답 받은 증거입니다. 그날 밤, 한나는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생을 부끄럽게 마친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축복할 때 축복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축복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종의 마음에서부터 축복이 저절로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껏 축복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축복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우리가 반드시 숙지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한나가 단지 아들이 없어서 주님께 울부짖었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필자가 2020년 2월 중순 이스라엘 실로에 방문하여 앞에서 가이드하는 목사님을 말씀을 듣고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을 보고, 이스라엘 민족과 나라를 보고, 도탄에 빠진 이스라엘을 보고 기도하는 한나는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민족의 지도자를 구했고, 그리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아들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간절히 구하고 원했던 아들을 하나님께서 주시자마자 아낌없이 하나님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황은 남편 엘가나가 둔한 사람이어서 한나의 마음뿐 아니라 민족의 위기를 실감하지 못함을 암시하고 있으며, 영적으로 가장 민감해야 할 엘리 제사장조차도 두 아들들이 방자히 행하는 것을 방치해두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함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32Km 떨어진 실로는 이스라엘의 남북을 이어주는 중심도로 이기에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실로를 떠나셨을 때 실로의 번영도 빛이 바라고 말았습니다. 실로가 이스라엘의 수도 역할을 했던 것은 무엇보다 그 가운데 성막이 진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막의 지성소에 모신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표였습니다. 그런데 주전 1102년, 아벡 전투를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대신에 하나님을 끌고 나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를 제멋대로 전쟁터로 가지고 나간 것이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라는 신앙으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간 것이 아니라 마치 사나운 짐승이나 무서운 무기를 들고 나가듯이 언약궤를 들고 나가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부리고자했습니다. 이 무서운 범죄는 엘리 제사장과 그 두 아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참극으로 이어졌습니다(삼상4:3-18). 

그 시대를 반영하는 고백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뜻의 ‘이가봇’입니다(삼상4:21). 언약궤가 없는 실로의 성막은 그 구실을 상실했고 성막이 떠나버린 실로는 서서히 잊혀진 변방의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실로의 성막이 떠나버렸듯이 영원할 줄 알았던 예루살렘의 성전 역시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공으로 완전히 불타 무너져버렸습니다. 실로에 있던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듯이 예루살렘 성전의 언약궤는 바벨론에 빼앗겨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실로를 통한 경고와 회개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을 때 예루살렘도 실로의 뒤를 따라가고 만 것입니다.

구약시대 실로의 쇠퇴는 오늘날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언약궤와 같은 말씀을 모셨다며, 자만하고 형식적으로 신앙생활하면서 때로는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성도의 범죄를 강하게 경고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 실로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안식과 평화를 완성시키신 사건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에도 참 실로를 선물해주실 것을 대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실로의 유적지는 실로의 흥망성쇠가 오직 성막의 유무에 놓여있었음을 역사적으로 증거하며 우리의 마음 속에도 성막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것을 종용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보신 적이 언재인가요? 오늘 한나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nygo4tgc@yahoo.com

04.0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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