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학습되어야 한다

빌립보서 2장 19-24절
신두현 목사

(뉴욕천성장로교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단순히 운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 운 좋다. 축하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운이 좋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오클라호마에 사는 40대의 남자는 운이 좋아서 200만 달러 로또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자 부부간에 갈등이 생겼고 아내와 딸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습니다. 보십시오. 행복은 운이 좋아서 오는 게 아닙니다. 행복은 운의 문제가 아니라 학습의 문제입니다. 행복은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배우면 인생의 행복이 막 넘칠 수도 있고 배우지 못하면 인생의 불행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 삶에서 배워야 할 자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자질: 남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 되기 

 

20-21절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이 밖에 내게 없다는 뜻은 ‘디모데같이 남에게 진정한 관심을 갖는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자기에게만 진짜 관심이 있고 남에게는 가짜 관심을 보입니다. 디모데 같은 사람이 드뭅니다. 

바울은 선교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진짜 관심을 갖는 사람은 디모데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인정하는 것은 세상엔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고 남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이는 적다는 것입니다. 

저는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바라던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 후에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결혼하고 좋은 차도 타고 집 장만도 하고 사업도 성공했는데,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왜 많지 않을까요? 1970년대 한국은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가수 윤항기 씨가 부른 노래가 있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저도 그 노래를 참 좋아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행복을 노래하며 살았는데, 오늘날은 여유가 있습니다. 쉴 수 있습니다.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입에서 “행복해요”라는 말을 잘 듣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미국 역사에서 지난 200년 동안 인쇄된 백만 권의 책을 연구했다는 보고서를 보면 과거에 많이 쓰던 말들과 지금 많이 쓰이고 있는 말들 비교한 자료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용빈도가 엄청나게 늘어난 말들은 (내가 I), (나를 me), (내 것 my), (내 선택 choice), (스페셜 special) 같은 말들이고, 사용빈도가 줄어든 말들은 (책임 responsibility)'와 (기도 prayer)였다고 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중심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되어가면서 행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텔레비전 광고들 보십시오. 잠재의식 속에, “당신이 중요하다! 당신의 기쁨이 최고다!” 이런 메시지를 심어주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나만 좋으면 되나요? 오늘날 모든 것이 자기중심성, 이기심을 자극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찌 되었든 관심 밖입니다. 이런 영향이 교회까지 들어오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근교 어떤 한인교회 이야기입니다. 예배드릴 장소가 없어서 미국교회를 빌려서 예배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미국교회는 시설은 멋진데, 교인은 10명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거의 할머니들이었는데, 그중 한 분이 돌아가셔서 9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한인교회는 은근히 미국교회가 더 줄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교회 문 닫아야 인수할 수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 이거 바른 생각일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 교회 방문하신 나이가 드신 목사님이 그걸 아시고, 한인교회 교인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남이 망하고 내가 잘되는 것은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그 한인교회 교인들은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미국교회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이든 미국 할머니들을 정성껏 보살펴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한인교회가 점점 행복해지고, 행복해지니까 사람들이 몰려오고,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서 몇 년 지나서 인근 마운틴뷰의 멋진 지역에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자기중심의 결박을 푸니까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자기중심성을 뚫지 않고는 행복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디모데처럼 진심으로 남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도넛을 좋아하는데요, 도넛을 볼 때마다 참 성경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도넛은 자기중심이 없습니다. 광고문구 보십시오. "나는 도넛을 좋아합니다. 도넛은 자기중심적이지 않습니다(I love donuts. They are not self-centered at all).” 구멍이 뻥 뚫려 있으니까 자기중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 은혜롭지 않습니까? 도넛이란 말에 우리 이름이 들어가면 어떨까요? “나는 신주현을 좋아합니다. 목사라서요? 아닙니다. 신주현은 자기중심적이지 않아서요!” 저는 이런 사람 되고 싶습니다. 

배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 입에서, “나는 남편을 좋아합니다. 그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나에게 관심을 줍니다.” 이런 남편들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남편들 입에서 어떤 칭찬이 나와야 합니까? “내 아내가 교회 가서 변했습니다. 남편인 나에게 진심으로 잘해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넛이란 말에 교회이름을 넣어보십시오. “나는 ◯◯교회를 좋아합니다. ◯◯교회는 자기중심적이지 않습니다.” 이 땅의 이민교회들이 자기 교회만이 아니라 주변의 교회들과 더불어서 행복해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자질: 다른 사람들이 신뢰하는 사람 되기 

 

지금 여러분이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몇 분을 떠 올리시고,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저 사람들에게 신뢰받는 사람인가?” 주변에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신뢰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만약에, 아무도 여러분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해지고 싶다면 사람들이 신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2절을 보면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누가 안다고 합니까? 너희. 너희는 누굽니까? 빌립보교회 성도들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속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교인들이 믿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용한 인물들을 보면 사람들에게서 신용을 얻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크레딧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스토리를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시위 대장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노예생활 할 때였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부인,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쁜 부인이었을 것입니다. 고대사회의 권력자들 부인이 그랬습니다. 아마도 미스 애굽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젊고 잘생긴 요셉을 유혹하다가 안 되니까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고 했다고 보디발 장군에게 고자질했습니다. 그때 왜 보디발 장군은 요셉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창세기 39:19절 보면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고 했습니다. 분노했으면, 요셉을 죽여야 마땅한데, 죽이지 않고 왜 감옥으로 보냈을까요? 계시적인 사색을 하면서 요셉을 감옥에 넣은 그날 밤 보디발 장군과 그의 부인의 부부싸움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부인: 요셉을 감옥에 보내다니요? 나를 겁탈하려고 했습니다. 죽여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보디발 장군: 요셉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를 믿는다. 이 요망한 것! 너, 무슨 짓 했어!! 이렇게 부부싸움 했을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가 그렇습니다. 함께 지내면서 크레딧이 생기면 그 사람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보디발이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레딧이 좋으면 죽지 않습니다. 크레딧이 좋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미국사회는 크레딧 사회니까 크레딧 리포트를 뽑아 볼 수 있습니다. 크레딧 점수가 높으면 돈을 빌릴 수 있지만 낮으면 돈 빌려주지 않습니다. 이건 은행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은요, 여러분의 신용조회를 매일같이 하고 있다는 것 아십니까?

“저 사람은 말하는 것하고, 행동하는 것하고 일치하지 않아! 가면 쓰고 있구나!” 이렇게 신용 평가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극장에서는 한 배우가 여러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가면을 몇 개씩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역할이 끝나면 다른 가면을 쓰고 다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있는 배우를 가리켜 “히퍼크리트, 우리말로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위선자라는 단어가 극장의 가면 쓴 배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위선자로 부를 때는 그 사람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교회에서는 이렇게, 아내에게는 이렇게.” 진실함이 없이, 상황극 하는 배우 같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는 크레딧이 안 좋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좋은 사람들을 머물게 하려면 디모데처럼 신실한 사람이 되십시오. 요셉처럼 신실한 사람 되십시오.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는 사람 되십시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신행일치하면 됩니다.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면 됩니다. 이것을 신실함이라고 합니다. 

디모데에 관한 설명에는 항상 신실함이 들어갑니다. 말한 대로 사는 디모데였습니다. 약속하면 지키는 디모데였습니다. 제가 두 문장을 말할 텐데요, 듣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돈 좀 버셨습니까? 그럼 됐습니다!” “신실합니까? 그럼 됐습니다!” 돈 좀 버셨습니까? 그럼 됐습니다! 이 말에는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좀 우습지요? 돈이 모든 것을 커버하진 못합니다. 

그러나 신실함은 하나만 있어도 됩니다. 모든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약속하면 지킵니다. 말한 것은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래서 바울이 일을 맡길 때는 거의 100% 신실한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누구에게 맡기나? 유능한 자일까요? 아닙니다. 신실한 사람입니다. 나는 유능한데 맡기지 않는다고 푸념한다면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신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니까,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실함은 우리가 붙들 여러 가지 가치 중 하나가 아닙니다. 반드시 붙들어야 할 기본이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신실합니까? 그럼 됐습니다." 이것이 성도 인생 전체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인 저도 세상에 신실함을 보이며 살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매일같이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ambmcguy@gmail.com

03.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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