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이사야 6장 1-8절
유상열 목사

리빙스톤교회

오늘 말씀은 이사야가 소명을 받게 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명사건은 그가 처음으로 부름을 받게 된 사건이라기보다는 이미 선지자로 활동을 하고 있는 중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대하26:22), 하나님의 특별한 영적체험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새로운 사역을 위한 특별한 부르심인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8절 말씀 이후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의 현재의 삶의 자리가 영원한 소명의 자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들 중에 소명에 관한 내용이 많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을 하고 또 그 분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모든 성도는 이미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국민이나 시민은 누구나 다 자신이 속한 국가에 대한 기본적 의무를 갖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방법으로 의무를 이행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선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다 선교지로 가지는 않습니다. 각 사람마다의 부르심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명을 말하고 사명을 말합니다. 소명과 사명이란 말은 크게 보면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소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가 강하고 사명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 자체에 좀 더 초점을 두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엔 그냥 같은 의미로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1절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가 하나님을 본 때가 언제라고 합니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의 제 10대 왕으로 기원전 791년부터 739년까지 약 52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군비를 증강하고 변방을 탄탄하게 해서 국력을 크게 증강시키는 등 비교적 나라를 잘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숭배의 본거지인 산당을 없애지 않았고 통치 말기에는 자신이 스스로 분향을 하려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문둥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웃시야 왕이 죽은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웃시야 왕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웃시야 왕이 아직 왕의 자리에 있을 때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시종행적을 기록하기도 했지만(대하26;22), 그런 과정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을 바라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더 마음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을 때까지 문둥이로 그것도 하나님의 전에서 별궁으로 쫓겨나는 그런 비참한 상황가운데 웃시야 왕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인 걸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하나님보다 더 마음을 두는 그 무엇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간절하게 하나님을 바라볼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두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간증내용이 뭐냐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그게 물질이든 건강이든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오던 그 무엇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는 자는 누구나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명을 발견하고 그 일을 충성토록 감당하며 한평생을 살아간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이상의 복된 삶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세상의 그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존재적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될 때 내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사야가 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1)“…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1절b). 

이사야가 바라보던 지상의 왕 웃시야(“여호와는 나의 힘”이라는 뜻)는 죽었습니다. 실제로 웃시야는 그의 선한 통치기간 동안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힘이 있는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그의 업적을 기록하는 데에 전념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 왕은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이사야가 보는 현실적 상황이 무엇입니까? 

웃시야 왕은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주님은 높고 높은 하늘 보좌에 앉아계십니다. 웃시야가 살아있을 때는 보좌가 비어 있다가 그가 죽고 나서야 주님께서 그 보좌에 앉으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늘 그 보좌에 앉아계시는 것입니다. 웃시야가 죽고 나서야 이사야가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보게 된 겁니다.

그러면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요? 1절 중반 이후부터 쭉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계속해서 2절과 3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2)"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세상의 모든 왕권을 초월해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적 권위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스랍들이 크게 하나님의 거룩성을 세 번이나 외친 겁니다. 여기서 세 번이란 말은 최상급을 표현하는 히브리적 숫자 개념이기도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삼성송’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집에도 있습니다(“거룩, 거룩, 거룩”). 이제 스랍들의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을 하십니까? 4절을 보겠습니다. 

4)“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여기서 창화라는 말은 서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다, 혹은 외치다 라는 뜻입니다. 스랍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큰 소리로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받으시고 응답을 하십니다. 

4절 계속 보겠습니다. “…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과 영광의 위엄이 있는 모습으로 현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시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거룩과 위엄과 그 분의 영광 앞에 그냥 엎드려 아무 말도 못하고 경외감을 갖는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본성상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도 그런 반응을 보입니다.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설 수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고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지 않는다면 누구나 다 망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할 수 있는 말이 이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러면서 이사야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5)“…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현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이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세상에서의 출세나 성공이나 명예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구나,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된 진실한 고백과 그에 합당한 자세를 보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사야 선지사가 용서를 받습니다. 6, 7절을 봅니다.

6)“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우리가 반드시 알 것은 회개 없는 용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용서 받았다”라는 말입니다. 맡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신약이후 사망으로 인도하는 원죄는 맨 처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고백했을 때 용서받은 게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알 것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 그 믿음을 통해 의인으로 칭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얻게 된 것이지, 실제적으로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한 존재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사야가 누굽니까? 예언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할 만큼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앞에서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겠습니까? 요한1서 8절이 그걸 증거 합니다.

8)“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러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용서받을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요한1서 1장 9절입니다.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구약이나 신약이나 인간은 누구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가 있는 상태로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상의 삶에서 짓게 되는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음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제도를, 신약이후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지은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정리합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각자마다에게 주어진 분명한 부르심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소명, 그 사명을 별견하고 충성토록 감당해 나아가는 삶이야말로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고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명을 위한 부르심의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달콤한 소리가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내 마음이 원하는 소리도 아닙니다. 특별한 경우 하나님의 사람을 통한 부르심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여러분이 처한 어떤 상황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뭔지 그 소명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죄를 사함 받고 깨끗한 심령으로 엎드릴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소명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없을 것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십니다. 8절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소명 앞에 이사야가 답을 합니다.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이와 같은 즉각적인 순종의 결단이 있게 되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livingstonech@gmail.com

02.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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