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 연합감리교회)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히11:9).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할 때 욕심 부리지 말고 살자, 세상에 집착하지 말자, 언젠가는 다 떠나게 될 것이다. 다 놓고 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등바등 대며 살지 말자, 무거운 인생의 짐을 다 내려놓고 구름에 달 가듯이 마음 비우고 초연하게 살자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나그네는 다르다.
나그네와 같이 사용되어지는 용어가 있다.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니“(창23:4).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출18:3), ”너희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출22:21).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대상29:15).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벧전2:21).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히11:9, 새번역).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행 17:21).
여기서 나그네는 자기 땅에 살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 몸붙여 사는 외국인 이민자 이주자를 가리키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이민자로 살았다. 야곱의 식구들도 이집트에서 이민자로 살았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도 이민자로 살았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도 세계 곳곳에서 이민자로 살아왔다. 이런 이민자를 성경에서는 나그네라고 부르고 있다.
나그네는 그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다. 외지인이다. stranger다. 객지에 사는 사람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를 떠나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영주권자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한시적으로 머물러 사는 사람들이다. 언제든 나가라 하면 나가야 되는 사람들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는 한마디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떠나 다른 곳에 가서 몸붙여 사는 사람을 말한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미국에 올 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왔는데, 와서 보니까 가나안이 아니라 광야였다. 미국에 오기만 하면 좋은 집을 짓고 은금이 증식되며 우양이 번성하고 소유가 넉넉하게 될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까 광야였다. 주말마다 뒷마당에서 파티를 열 것을 상상하고 왔는데 와서는 어떻게 살았는가?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영주권도 안 나오고 의료보험도 없고 언제 설지도 모르는 중고차 타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브라함도 부푼 꿈을 안고 가나안에 왔는데 와서 보니까 광야였다.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자리 잡고 살았다. 그곳은 가나안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최남단에 자리 잡고 있다. 브엘세바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과 살 수 없는 곳의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다. 브엘세바만 지나면 광야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가장 살기 힘든 곳에서 살았다. 가나안에 몸붙여 사는 사람으로 아브라함은 변방에서 살아야 했다. 주변인으로 살아야 했다. 결코 주류로 들어가지 못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오자마자 기근이 들었다. 그래서 양식을 찾아서 이집트로 내려가야만 했었다. 기근이 들었어도 가나안 사람들은 이집트에 내려가지 않았다. 창고에 모아둔 곡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식이 떨어지면 이웃에게서 구하면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돈이 있어도 양식을 구할 수 없었다. 기근이 온 상황에서 누가 아브라함 같은 이방인에게 양식을 팔겠는가?
이삭이 7번이나 우물을 빼앗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왜 우물을 빼앗겼을까? 왜 빼앗기는데도 가만히 있었을까? 왜 같은 일을 7번이나 당했을까? 이삭이 온유한 사람이라서 다투는 것을 싫어해서 그랬을까? 다른 데 가서 우물을 파면 또 물이 나올 테니까 순순히 내주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던 것일까? 아니다. 이삭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우물을 빼앗기고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우물을 파곤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살고 있던 곳은 블레셋 땅이었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에 몸붙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싸울 수 없었다. 아니 싸울만한 힘도 없었다. 나가라면 나가야 했다. 이것이 남의 땅에 몸붙여 살아가는 나그네의 삶이다.
성경이 우리는 나그네다 라고 말할 때 짐을 가볍게 지고 마음을 비우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나그네처럼 떠돌다가 가는 것이니 세상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그렇게 세상에 초연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은 일장춘몽이니 세상에 빠져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한 번 왔다 잠시 머물렀다 가는 인생이니 덧없는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나그네라고 말할 때, 그 뜻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고통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소외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불이익을 당하고 위협도 당하고 박해도 받고 내어쫓김을 당하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할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고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도 그렇게 살았다. 모세도 그렇게 살았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살았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도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초대 교인들도 그렇게 살았다.
이민 와서 사는 사람 쳐놓고 하늘에 지나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언제나 나도 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가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안 해본 사람 없을 것이다. 미국에 올 때는 다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오지만 와서 살다 보면 현실은 가나안이 아니라 광야다. 그래서 고국을 떠나온 것을 후회할 때도 많다. 처음에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돌아가자니 자존심 상하고,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자니 그것도 엄두가 안 나고, 돌아간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래저래 돌아가지 못하고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이민자들의 삶이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 살면서 먼 고향 하늘 바라보며 눈물지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짐을 쌌다 풀었다 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돌아가지는 않았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갈 기회도 있었겠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가 나온바 본향(하란)을 생각하지 않고 더 나은 본향(천국)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5-16).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계속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고는 싶었겠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가나안에 온 것을 후회도 했겠지만 그러나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다. 가나안에서 고향에서처럼 좋은 집을 짓고 살지는 못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눈에 보이는 가나안보다 더 좋은 가나안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떠나온 본향보다 더 좋은(사실은 비교도 안 되는)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가나안에서의 광야와 같은 삶을 버티고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미국 이야기보다 한국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미국보다 한국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한다. 마음이 늘 고국에 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민자들은 평생 고국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가 고향을 마음에 품고 살고 있듯이 아브라함은 하늘 가나안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먼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산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본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살았다. 하늘 가나안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 그곳을 사모하며 살았다. 그의 관심은 가나안에서 좋은 집을 짓고 은금이 증식되며 소유가 넉넉하게 되는데 있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늘 하늘 가나안에 가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도 서글퍼하지 않았다. 좋은 집을 짓고 살지 못해도 괘념치 않았다.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았다.
누구나 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산다. 음악 시간에 배웠던 멀고 먼 앨라배마 나의 고향은 그곳으로부터 시작해서 머나 먼 저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까지 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들이다. 고향에 대한 노래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고향의 봄’일 것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고향을 떠나 살아도 마음은 늘 고향에 가 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고향을 그리며 살았다. 그러나 그가 그리워했던 고향 돌아가고 싶어했던 고향은 하란이 아니었다. 그가 사모하며 살았던 고향은 하늘 본향이었다.
앞에 가는 차에 이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My another car is Benz. 이런 스티커가 붙은 차가 어떤 차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차를 타고 다녀도 정말 집에 좋은 차가 있다면 당당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타고 다니는 좋은 차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는 포니를 타고 다녀도 벤츠 타고 다니는 사람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에게는 "더 나은 본향"(히11:15)이 있지 않는가? 더 좋은 가나안, 영원한 가나안, 하늘 가나안,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11:10)이 있지 않는가? 그런데 세상에 무엇이 부럽겠는가? 우리를 위해 예비해두신 하늘 본향이 있는데 이 땅에서 좀 부족하게 산다고 기죽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아브라함도 가나안에서 포니를 타고 다녔다. 그러나 그를 위해 예비해두신 하늘 가나안에는 벤츠가 있었다. 이 땅에 있는 가나안에서는 13평 아파트에 살았다. 그러나 하늘 가나안에는 맨션이 있었다(요14:2, KJV). 그러기에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살았어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가나안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 나그네로 살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진짜 가나안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살아갔다. 그랬기 때문에 땅 한 평 없어도, 좋은 집 짓고 살지 못했어도, 가나안을 누리지 못했어도, 가나안에서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았어도 감사하고 행복했다. 더 좋은 가나안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철이와 철수가 땅 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다. 영철이는 땅을 많이 땄다. 철수는 조금밖에 따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해는 저물고 어둑어둑해 갔다. 그런데 저쪽에서 철수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였다. “철수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철수는 하루 종일 따놓은 땅을 미련 없이 버리고 집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영철이는 우두커니 혼자 남아 있다. 아무도 부르러 오는 사람이 없다. 집 없는 아이였던 것이다. 땅을 아무리 많이 땄으면 뭐 하는가? 돌아갈 집이 없는데.
인생이 이런 것이다. 지금 다 열심히 땅 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딴 땅 다 버리고 가야 한다. 땅을 많이 땄지만 돌아갈 집이 없다면 그 땅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무 땅 따먹기 놀이에만 골몰하지 말라. 영원히 돌아갈 집도 준비해놓아야 한다.
양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산에서 저산으로 하루 종일 옮겨 다닌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면 집으로 돌아와 아늑한 양우리에 들어가 편히 쉬게 된다. 또 양들은 여름철에는 몇 달씩 광야에서 지내야 한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면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겨울을 양우리에서 보낸다.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그럴 때가 온다.
시편 23편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런데 시편 23편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것이 결론이다. 시편 23편의 클라이막스다. 어떤 사람이 평생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 살았다고 하자. 그런데 그의 장례식에서 그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 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시편 23편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갈 때 누릴 수 있는 은혜와 축복들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들 가운데 단연코 최고는 바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온 나그네가 아니라 영원한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나그네 길을 걸어가는 천국 나그네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이 나그네 인생길 끝에는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영원한 집이 있다. 그곳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나그네 인생길에 평생 함께 동행해주실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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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