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세상에서 용기있는 믿음으로

사도행전 16장 35-40절
김홍석 목사

(뉴욕늘기쁜교회)

오래전에 한국에서 간첩의 누명을 쓰고 40년간을 억울하게 수감생활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무 살에 수감됐다면 육십에 누명을 벗고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지요 생각 만해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본인의 그 사십년의 젊은 인생을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 가혹한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바울과 실라가 억울한 일로 무죄하게 수감되어 무척 맞기도 하고 감옥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억울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할 상황입니다. 그 시간에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미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찬미할 때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기도하고 찬미하고 나서 일어난 상황이라 누가 보기에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보통 말씀을 대할 때 기적의 옥문이 열리게 된 것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옥문이 열렸으면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 후에 응답받은 것이니까 누구보다 가장먼저 옥문을 나서는 것이 지당한 일일 텐데 옥문이 열려도 바울과 실라는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간수와 그의 가정을 전도하기 위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날입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옥문도 열렸겠다 간수의 온 가정도 전도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옥문을 나설 모든 여건이 준비되었는데 바울과 실라는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게 된 동기는 귀신들린 어린 여종 하나를 앞세워 점치는 장사를 하던 주인들이 바울이 귀신을 쫓아주어 자유케 해주니 더 이상 주인들의 사업에 이가 없게 되니까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붙여서 때리고 옥에 가두게 된 것입니다. 정말 말할 수 없는 불의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불의한 일로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된 바울 일행을 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옥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보통 저희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이 억울한 일보다 크니까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참고 넘겨 전도의 일에 더 매진하게 하신 걸로 결론을 지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의한 일을 당했을 때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님을 오늘 말씀은 저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세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불의하거나 부정한 세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불의한 세상에서 예수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바울과 실라는 불의하게 옥에 갇힌 후에 석방을 위해서 출옥을 위해서 힘쓰고 애쓴 흔적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감옥에서 출옥할 모든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출옥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첫째, 불의한 일들을 책망할 줄 알아야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출옥할 여건이 주어졌지만 출옥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책망합니다.

37절 말씀에 “로마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우리를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우리를 가만히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옥에 가둔 불의한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책망하기 위해서입니다. 불의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당당하게 그 불의를 책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중국에서 실제 있었던 “44번 버스”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44번 버스 운전사 중에서 젊은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열심히 운전을 하는데 깡패 두 명이 그 버스에 올라타고 타자마자 운전사에게 시비를 합니다. 시비라기보다는 성 희롱을 하는 거지요. 

버스는 가야하는데 보다 못한 점잖은 신사 한 분이 그 깡패들을 말리려고 앞으로 나와서 야단쳐서 가르치려다가 오히려 많이 맞았습니다. 깡패들이 계속 운전사를 희롱하면서 차를 출발시킵니다. 좀 인적이 드믄 숲이 있는 곳에서 차를 정차시키고 급기야는 숲으로 운전사를 끌고 가서 폭행을 하고 차로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다시 출발하자고 깡패들이 명령합니다. 운전사 아가씨는 울면서 말합니다. 저기 저분 아까 당신들이 때린 그 아저씨를 이 차에서 내리게 하라, 그 사람 내리지 않으면 나는 출발하지 않을 거라고 깡패들에게 말합니다. 기분도 안 좋은 사람인데 안 내리겠다고 하는 그 분을 강제로 차 밖으로 몰아내고 빨리 가자고 재촉합니다. 그 운전사는 출발합니다. 언덕을 넘어서 이 운전자는 큰 호수가 있는 지역에 다다를 때 전속력으로 호수로 돌진하게 됩니다. 자기도 물론 차에 탄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를 낸 것입니다. 

그 운전자의 정의로운 심판은 그 차에 탄 모든 승객, 깡패 포함 죽음을 맞게 한 것입니다. 그런 불의에 대해서 한 마디도 못한 여러분 모두는 살 가치도 없다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불의한 일을 보고 오늘날도 여러 경우에 우리는 침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니 조금이라도 내가 피해를 입게 될 것 같으면 침묵하고 못 본 척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불의에 대해서 무언으로 침묵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생각이고 이기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이 시대에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지하철 안에서 흑인들에게 한 여인이 돈도 지갑에서 빼앗기고 추행을 하는데도 아무도 멈출 것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들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 저는 오늘날 우리 뉴욕교계의 불의한 일과 부정한 일에 대한 의견들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해마다 총회 때가 되면 후보들을 등에 업고 마치 장사라도 하듯이 해를 이어가며 금품수수며 마치 어린 여종 하나 데리고 점하는 장사군 들과 같은 행태가 끊일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뻔히 누구누구를 알면서도 쉬쉬하며 올바른 정의 앞에 무뎌진 세상의 정치판을 보듯이 같은 부정이 우리 교계를 어지럽히는 이 상황에 대해서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덮고 못 본척해 주는 것이 복음의 정의를 세워가는 일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 불의에 대해서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바울이 당당하게 책망했던 믿음의 용기가 우리에게 절실한 때인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이런 불의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상관들을 불러서 단단히 야단칩니다. 그런 결과 39절에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아가니” 라는 말씀이 얼마나 우리를 시원하게 해주는 말씀인줄 모릅니다. 단단히 야단치고 나니까 그들이 취한 행동들입니다. 

바울이 그런 불의한 일을 당했지만 흔히들 예기하듯이 ‘뭐 한 번 무엇 밟은 셈 치지’ 하고 스스로 옥문을 나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내가 언제 여기 또 오겠나. 루디아를 중심으로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질 텐데 나 하나 참으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면 번거롭게 상전들 장사하는 사람들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불의한 일에 대한 확실한 복음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쩌면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이 상황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바울사도는 이런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습니까.?

적어도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취를 취하는 것입니다. 39세의 젊은 나이로 나찌에 항거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던 독일의 신학자이며 목사인 본 훠퍼는 “불의한 세상에서 왜 우리는 잠잠합니까?”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적어도 내가 당하는 불의한 일에 대해선 철저한 재발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했던 바울 사도입니다. 

 

세 번째, 불의한 일을 당한 자를 위로하는 일입니다. 

 

바울 사도 일행은 옥에서 나와서 곧장 루디아의 집으로 향합니다.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교회의 전신이고 그 집이 빌립보교회가 되었으므로 그 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있습니까? 아니 누가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당연히 아무 잘못 없이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바울과 실라입니다. 당연히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바울과 실라를 위로해야 하는데 오히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로하러 들리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위로를 보게 됩니다. 세상의 위로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합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 무지한 사람에게 위로합니다. 그런데 불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길은 고난 받은 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위로합니다. 사실 우리 일상에서 나보다 월등한 사람이 내게 위로할 때 정말 위로가 되던 가요? 소위 목회에 성공했다하는 분들이 위로한다고 나의 목회에 진정한 위로가 되던가요? 

엘리스 그레이 라는 분이 쓴 책 “희망을 품은 여인들의 보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엘리스 그레이와 친구가 만나서 식당에서 아주 심각하게 걱정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로 옆 테이블에 있던 여인이 다가와서 말을 건네더랍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 분의 아픔을 헤아리시며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 분을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위로하고 나가는데 모습을 보나까 지팡이를 의지한 장애인이었습니다. 어찌됐든 두 여인은 마음에 푸근함을 느끼고 있는데 웨이트리스가 다가와서 방금 인사를 건넨 그 부인에 대해서 아는 분인가 물었습니다. 전혀 오늘 처음 보는 분이라고 하니까 그 웨이트리스는 그 분에 대해서 소개를 합니다. 

“조금 전 그 여인은 작년에 대단히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사고로 여러 번 수술을 했는데도 좀처럼 회복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아픈 그 여인을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작장도 잃어버린 채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분입니다.” 

웨이트리스로부터 그 여인에 대해서 소개를 받고 잔잔한 감동이 밀려오더랍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그 여인, 불행한 형편에 처해서도 남편으로부터 그런 불의한 처우를 당하고서도 자기들을 위로하고 간 그 여인,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해준 그 여인에게 큰 감동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누군가가 위로해줄 때 오히려 어떤 경우에라도 내가 면저 위로하여 이 불의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위로가 살아 역사하심을 나타내어 불의한 세상에서 믿음의 용기를 선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hongskim1623@yahoo.com   

07.3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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