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왕 므낫세

열왕기하 21장 1-9절
이준성 목사

(뉴욕 양무리교회)

1. 서론

 

유다 말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왕으로 우리는 히스기야와 요시야를 말합니다. 두 왕에 대한 열왕기서의 평가는 다윗과 솔로몬에 필적할 정도라고 소개합니다. 히스기야는 솔로몬 이후 13대왕으로 29년간 통치하면서 솔로몬 이후 가장 성대한 유월절 행사를 치렀으나 치명적인 병에서 치유 받고 생명이 15년을 연장되었을 때 가장 악한 왕 므낫세가 탄생합니다. 

므낫세는 14대왕으로 55년을 통치했으나 아버지의 종교개혁을 원점으로 돌린 가장 사악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손자 요시야가 31년을 통치하면서 히스기야보다 더 성대한 유월절 행사를 치렀지만 끝내 멸망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우상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산당, 바알, 아세라, 일월성신, 성전에 제단, 아들을 불태우고 점, 사술, 신접한 자, 박수... 왜 므낫세는 이런 일을 행했고 또 아합왕 이후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되었을까요?

당시의 국제정세는 앗수르의 영향권 안에 있었지만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힘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독립을 꽤했지만 앗수르 산헤립의 침공으로 국가적 위기 상황을 야기합니다. 독립을 위해 바벨론과 교류도 했지만 결국 바벨론에 멸망합니다(BC 586). 

히스기야 사망 당시 12살이던 므낫세는 앗수르의 보호아래 왕으로 책봉되었고 애굽의 제26왕조까지 후원했던 앗수르의 영향권에 들어갑니다. 당시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패배한 나라는 승리한 나라의 신들을 충성맹세용으로 섬기고 조공도 바쳤습니다.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불만을 품었던 일반대중을 위하여 민란 억제용으로 일월성신 같은 토속 신앙도 허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므낫세는 앗수르 파벌과 바벨론 파벌 그리고 애굽 파벌 등으로 갈라진 유다의 내부 문제 때문에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어딘가의 속국으로 있어야 잘 살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성경은 므낫세를 하나님을 버린 가장 악한 왕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2. 악한 기준이 무엇인가?

 

(1)선택의 기로 경제냐? 종교냐?(2-7절a)

2절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서... 7절 성전에 세웠더라.”

우리는 종종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만을 믿을 이유가 있느냐?”

아마도 므낫세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성전에 우상을 세웠을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므낫세는 하나님도 믿었고 국제적 상황에 따라 강대국의 신들도 섬겼을 뿐입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중국을 선택하듯이 국제 정세에 순응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질문은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더 붙들고 의지할 수는 없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도 처음에는 므낫세와 동일하게 이방신들을 성전에 두었을 것입니다. 나라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었다?”라는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종교개혁의 원동력을 얻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이란 믿는 자들도 어쩔 수 없다는 방식이며 속고 속이는 일이, 선보다 악을 행해야 내게 유익한 것을 보면서 편안한 세상살이를 선택하게 됩니다.

코로나 이후 목회자들의 고민은 대면예배입니다. 그러나 그 예배는 교제가 없는 신앙생활이며 초대교회의 훌륭한 코이노니아교회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 어쩔 수 없었던 형편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것이 므낫세를 통한 성도들의 교훈입니다.

므낫세는 훌륭한 왕입니다. 그의 치세 55년 동안 경제는 발전했고 삶은 윤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외세의 눈치를 보며 몸을 숙이는 일에 전력했습니다. 실제로 유다의 땅은 반란군이나 점령군이나 모두에게 지나가는 길목이며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외세의 눈치는 중요했지만 하나님은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 변화에 발맞추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 몫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려는 세상 사람들의 틈 속에서 늘 조마조마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만큼의 은혜 속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며 새가슴으로 살았던 므낫세가 아니라 날마다 희망과 평안으로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길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성전을 버린 신앙(7절b)

7절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성전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성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

성전 신앙! 구약시대는 성전 중심의 신앙이고 성전은 구별된 장소였으며 성막(출26, 27)으로 출발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죄인들을 만나는 장소로 허락(출25:22)하셨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비로소 회당이 형성되었지만 성전신앙은 유대인들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성경이 완결된 오늘날은 성전신앙에서 성경신앙으로(히10:16) 변화됩니다. 그러나 선택은 자신이 하며 신앙적인 삶은 반드시 자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악한 아버지 아하스(12대) 왕에게서 경건한 히스기야(13대)가 출생했고, 히스기야 같은 경건한 왕에게서 므낫세(14대) 같은 악한 왕이 탄생했으며 아몬(15대) 같은 악한 아버지 밑에서 요시야(16대) 같은 선한 왕이 나왔습니다. 

즉 좋은 부모라고 다 좋은 자식이 아니고 나쁜 부모라고 다 나쁜 자식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교육이나 환경이나 가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선택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점에서 므낫세는 성전을 버렸고 신앙을 버렸으며 하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3)신명기적 관점(8절)

므낫세의 신앙을 신명기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명기의 약속은 “네가 ...하면 나도 ...하겠다”입니다. 신명기 11:26. 30:19절은 대표적인데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요 안 들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동일하게 본문 8절은 “만일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모세 율법을 지켜 행하면... 유리하지 않게 하리라” 므낫세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신명기적 관점으로 보면 경제가 아닌 신앙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국가적으로 번영을 이끌었다 해도 결국 우상숭배로 책망 받았고 멸망한 다른 민족보다 더 악하다고 결론을 맺습니다.

결국 유다의 멸망은 므낫세와 연관이 있습니다. 왕하 23:26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실제로 므낫세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이었으나 그가 악하다고 한 평가는 전반적인 삶의 여정이 악했다기보다는 종교적인 평가가 악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적으로 선하고 좋은 일 많이 하고 기부를 많이 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자가 착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 히스기야 시대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으로 남북통일의 꿈이 고조되던 시대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경제 봉쇄로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고 경제는 피폐했으나 선한 왕으로 추앙을 받습니다. 그러나 므낫세 왕은 앗수르의 비호아래 국제 무역이 활성화되었고 경제성장으로 인한 인구 증가가 두드러진 시기였습니다. 또한 왕권의 강화로 백성들에 대한 국가 통제력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비록 다른 면의 약간의 성공이 있었다 해도 신명기 역사가의 평가는 냉정했고 그 판단대로라면 므낫세는 신앙 우선주의를 버린 세상과 뒤섞여 성도인지 불신자인지 모를 정도의 혼군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므낫세 시대의 물질적인 약간의 성공은 백성들이 심판을 돌이키고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는 길을 놓쳐버린 마지막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결론

 

므낫세의 이런 악행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유독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1절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왜 유독 어머니의 이름을 거론했을까요? 헵시바란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The Lord delights in you)라는 뜻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여인이 버림받는 길은 오직 하나로 부부 정절을 파괴한 음행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부부관계를 파괴한 음행자였습니다. 

므낫세는 어머니의 신앙을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의미요 유다의 멸망 뒤에 하나님이 헵시바라 선언(사62:4)해서 구속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어머니의 신앙이 조금도 없었던 므낫세 같은 이스라엘에게 이제는 새 이름을 헵시바로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바보스러운 하나님? 속이 없으신 하나님? 만신창이 죄악으로 더러워진 우리에게 헵시바라고 불러주십니다.

므낫세가 왜? 무엇이 악한가? 결국 성경은 그의 악한 행위가 아니라 신앙을 책망했던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 헵시바가 되기 위해서 신앙을 붙들라는 간곡한 호소였던 것입니다. 신앙 우선으로 하나님의 헵시바가 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flocks3927@gmail.com

06.19.2021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