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 모두 많은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지역을 이동하면 쿼런틴(격리)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요즘 우리 대부분이 쿼런틴을 경험하며 현장예배도 제한된 상황에서 간신히 드리고 있습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성도들은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다니엘도 포로시절 예루살렘에 갈 수 없는, 즉 현장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습니다. 장소는 달랐어도 그가 드린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온전한 예배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예배’가 어려운 이 때에 각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라 할지라도 여러분의 예배도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드리는 온전한 예배가 되길 소원합니다. 다니엘은 예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길을 가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까? 길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합니다. 멈추지 않는다면 더 멀어질 수밖에 없고 돌아오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19로 억지로라도 멈추게 되었다면 혹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은 나라 잃은 아픔 속에서 어린 나이에 이방에 포로로 끌려가서 왕 넷을 섬기며 고위직을 지냈습니다. 그는 단지 성공신화만 이룬 것이 아닙니다. 그는 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생활의 특징은 기도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과 메대 파사 왕들, 즉 느브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그리고 고레스에 이르기까지 왕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관직을 수행하며 수십년의 세월을 이국땅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며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시기하는 무리들이 그를 모함하여 사자굴에 들어가는 일이 있었어도 그는 굴하지 않고 기도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특히 9장에는 그가 무너진 예루살렘성과 황폐한 조국을 위해 애절하게 기도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히 애국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았기 때문에 기도한 것입니다. 단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우리는 기도할 때 아무래도 자기 주변을 위해 기도할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우리는 열심히 기도합니다.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경영하는 사업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지경을 넓히길 원하십니다.
다니엘에게도 주변에 직면한 사적인 문제가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말씀을 읽고 깨닫고 보니 기도제목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 때 참된 기도제목이 나옵니다.
다니엘은 그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었습니다. 단9: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사실 기도는 내용보다 일단 그 대상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어떠한 분이냐가 중요합니다. 다니엘은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그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우리의 믿음이 세상 사람들의 신념과 크게 다른 이유는 그 믿음의 대상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민족의 고난이 죄 때문임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황폐는 전적으로 그 백성의 죄 값인 것을 인정하며, 그 죄를 원통히 여기며 슬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오늘의 문제가 우리 죄 때문임을 알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나 환난이 있으면 남 탓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고통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사람의 기도는 공중만 울립니다.
환란이 오면, 자기의 죄에 대한 채찍임을 겸허히 인정하며 자기의 허물을 슬퍼하며 회개하며 기도하는 것이 바른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단9:7 “...수치를 당하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다니엘은 9장에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무려 28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자기를 포함한 유다백성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서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무슨 죄가 그리 많았을까요? 그러나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며 기도하는 것이 기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줄 믿습니다.
이제 죄의 고백을 하던 다니엘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용서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하였다(단9:8-9). 죄인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지요.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것임을 믿고 바라보며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통성기도 할 때 주여 3창을 하고 시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주님을 한번만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이기에 ‘주여’를 세 번 부르며 기도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였나?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단9:18-19). 물론 주문처럼 의미 없이 부르면 문제이겠지만 다니엘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습니다.
인간은 조석 간에 변합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에 기초하여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확실합니다. 다니엘의 기도의 특징을 말한다면, 그는 궁극적인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 기도하였다는 점입니다. 단 9:19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다니엘이 볼 때 인간을 구원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이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을 의지하며 그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때 그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단9: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사자를 보내어 자기 계획을 다니엘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다니엘이 받은 응답은 그의 기대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포로에서의 귀환과 예루살렘의 재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칠십이레 이후) 메시아에 의한 그 백성의 구원이 성취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론
요즘 바이러스로 인해 모두 움츠리고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억지로 쿼런틴을 견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 험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단 한 가지, 기도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슷한 환경에서 드린 다니엘의 기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현장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기도한 다니엘처럼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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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7.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