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요한복음 6장 16-21절
장성철 목사

(보스턴장로교회)

현대 교회에서 안타까운 현상은 역사적 예수, 즉 인간 예수만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이야기들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힘과 노력으로 따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어린 아이들을 반기며, 안으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눈 먼 사람을 보게 하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을 힘 닫는 데까지 모방하는 생활을 권면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 우리 삶에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반쪽만 알려주는 부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는 더 이상 역사적 예수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영광의 주님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의 중요성은 단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다가 죽은 그 분의 생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역사적 사실도 우리가 믿지만, 현재 세상과 주님의 관계성은 우리가 아침마다 눈을 뜨고 밤마다 잠자리에 드는 현실에서 살아있고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아름다운 기적 이야기는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삶에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동정심이 많은 주님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주님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영적인 안목 없이 그저 물질적인 메시야만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은 혼자 산으로 기도하는 곳을 찾아 가셨습니다.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기 전에 세례 요한은 목이 베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제자들과 나누시면서 모두 마음의 큰 근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에서 하루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주님을 따라다녔던 군중을 바라보시며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길 잃고 헤매는 양 같은 군중들이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은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병을 고치시고, 말씀을 선포하시고,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을 보니 주님의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지셨습니다. 같이 생활하며 옆에서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배웠을 법 한데 아직도 주님을 실망시키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가운데 배에 있습니다.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칩니다. 열심히 노를 저어 갑니다. 주님은 산에서 가련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산 위에 올라가 제자들을 바라보시던 긍휼의 주님이 하늘 보좌에 오르셔서 우리 인생을 지금도 내려 보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체휼하신(히4:15), 그래서 심장을 뛰게 하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하늘 보좌에서도 똑같이 느끼시는 주님입니다. 그 주님이 하늘 보좌에서 중보하십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부모와 형제가 없다고 해도 지금 하늘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또한 주님은 하늘 보좌에서 문제의 빠진 인생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십니다. 주님은 높은 산에서 곤경에 처한 나름 바닷길에 익숙하다고 하는 제자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중간 지점, 가장 무서운 자리에 있습니다. 6마일을 가야 건너가는데, 십리 길- 3마일 쯤 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주님이 제자들을 보시고 위기에서 구하시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긍휼의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우리의 형편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신속하게 도와주십니다. 주님의 귀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언제든지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팔을 넓게 펼쳐서 우리를 구해주십니다. 하늘에서 우리의 슬픔의 속삭임도, 아무리 작은 신음의 기도도 다 듣고 계십니다. 세상의 친구에게 말하지 못하는 사정도 예수님은 귀 기울여 듣고 응답해 주십니다.     

 

물 위를 걸어가신 그리스도는 승리의 주님입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 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6:19). 6마일쯤 되는 거리 중 절반을 갔습니다. '바다 가운데'(막6:47)에서  위험이 닥쳐온 것입니다. 배가 가라앉게 생겼습니다. 3마일이나 헤엄친다는 것도 폭풍우 가운데 불가능 합니다. 위기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주님에게는 승리의 순간이었습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마14:25). 초저녁이나 이른 새벽이 아니라 가장 깊은 밤 시간입니다. 심리적으로도 칠흑 같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정확한 시간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는데 밤 사경과 같은 어둠과 혼란으로 난장판인 세상에서도 도움을 구하는 영혼의 부르짖음을 듣고 반응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6:19).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물 위에 두 발이 그려진 그림은 하늘의 절대자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역사적 예수는 인간이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수는 모든 사물의 주관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람도 잠잠하게 하십니다. 성난 파도도 고요하게 합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만 하셔도 자연이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던 바로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홍해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승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위협적인 상황이나 사탄의 공격에도 마찬가지로 승리하신 주님입니다. 친구들도 주님을 배반하고 마귀도 주님을 거세게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의 대적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무덤에 내어 묻어버렸습니다. 끝장을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삼일 후에 예수님은 승리의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수척한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에 무력하게 달리신 분이 아니라, 힘차고 생기 있는 승리와 용기의 그리스도로 우리 삶을 주관하십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초자연의 사람들입니다. 초자연적으로 거듭났고, 초자연적인 영적 싸움을 싸우며, 초자연적인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승리로 인도하는 초자연적인 대장을 따라 가는 사람들입니다“(허드슨 테일러).

승리의 주님이 이제 승리의 메시지로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6:20) 주님의 메시지는 우리 마음에서 두려움을 제거해 줍니다. 폭풍이 우리를 에워쌓아도, 바람이 세차게 불고 지나가도, 더 이상 버티고 전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도, 승리의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나는 메시지입니다. 

"내니…" "It is I" 주님이 함께하심이 그리고 믿음이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두려움은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정적인 것입니다. 쌓아둘 때 생기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쌓아두면 두려움이 에워쌉니다. 그런데 건지고 구하는 것은 동적인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의 다윗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4).

 

물 위를 걸어가신 그리스도는 목적지로 인도하는 주님입니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6:21). 세상의 지성인들과 지도자들은 세상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지만, 결국 나라의 운명이나 개인의 종착점은 오직 한 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운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입니다. 주님은 다음 드라마를 펼쳐 보여주기 위해 현재의 역사를 마무리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운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6:21). 9시간동안 열심히 노를 저었는데 3마일 갔습니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 머물러있습니다. 수많은 우리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빙글빙글 돌아서 제자리입니다. 어딘가 가 있을 것 같은데 제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책도 읽고 연구도 해서 인생의 문제를 이제 해결할 법도 한데… 철학에, 심리학에, 테크놀로지에, 여러 지식 분야에 심취했는데… 그런데 제자리에 있습니다. 물에 빠지는 인생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걸어가신 주님을 내 인생의 배에 영접하고 나면 배가 목적지로 향해 갑니다.

목적 없이 사는 인생같이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의 흐름을 따라 갑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길을 갈라 거슬러 헤엄쳐 갑니다. 운명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의 진보를 약속하고 보장해 주십니다. 인생의 목적지로 향해 가게 하실 뿐 아니라,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게" 해 주십니다(6:21). 예수님의 명령으로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가려고 배로 떠났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인생을 위한 계획이 있습니다. 창조에는 하나님의 디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 인생에 영접하기 전까지는 그 하나님의 디자인을, 디자인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배 안으로 영접될 때까지 배의 진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배 안에 계시니까 즉시로, 곧 항해의 목적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 위를 걸어가신 예수님의 표적과 기사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소개하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을 심지어는 형제들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잡으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요7:38-39).

인생의 배에 흘러넘치는 생수의 강-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인생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존재가 우연히(by chance) 세상에 있게 된 것이 아닌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우리는 걸어가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we should walk in them. 우리 앞에 계획하시고 펼쳐주시는 길을 찾고, 따르고, 이루는 것, find, follow, finish… 믿음의 인생은 진보할 뿐만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폭풍의 한 밤중에 주님을 배로 영접한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이 시간 여러분의 삶에 영접하여 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뻐서 배로 영접한"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런 복된 인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schang@bostonkorea.org

10.0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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