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늘기쁜교회)
32년간 크리스채니티투데이의 대표로 지낸 헤럴드 마이라 라는 분이 쓴 ‘격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서문에서 저자는 ‘우리가 세계적으로 혼란과 문화적 충격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는 동감할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며 많은 사람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든지 아니면 평범한 일상이지만 주변의 요구가 끊이지 않는 복잡한 생활에서든지 우리에게는 용기와 격려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로 모든 분야의 비상시국을 지내는 우리 모두에게 격려와 용기는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가운데 항상 어느 환경에서나 어느 시대에서든지 하나님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을 통하여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데 주저 없이 사용하셨던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위로와 격려하는 주체로 하나님은 우리를 드러내시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즉 위로자와 격려자로 살아가라 시는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유례없는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우리에게 가장 그리워지는 것은 아무래도 공동체의 생활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초대교회가 성령 충만하여 일으키시는 공동체의 변화된 모습이야말로 대단히 그리워지는 우리 교회들의 공동체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초대교회의 가장 아름답게 이뤄지는 공동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한 사람 바나바를 소개하시며 우리의 공동체를 초대교회의 성령공동체와 같은 공동체로 세워나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 믿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많은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도 성령께서 주장하시는 복음이 살아있는 공동체가 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바나바를 우리의 롤 모델로 격려자와 위로자의 역할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시대의 바나바와 같은 격려자와 위로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여러분 모두 되시길 바랍니다.
먼저 격려자와 위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1.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본문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단히 믿음이 좋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 받고 그들이 공동체생활을 이뤄 가는데 32절에,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라고 말씀하는데, 우리가 마음과 뜻이 하나 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음이 다르고 뜻이 맞지 않아서 얼마나 교회들이 어려운지 모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음과 뜻이 하나 되었다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은혜 받은 모습을 말합니다.
둘째로 그들이 은혜 받고 변화된 것은 32절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두 번째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은혜 받으면 나누게 되더라는 말씀입니다.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 받고 나누는 것을 보면 요즘 큐티한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은 말씀을 나누는 것을 많이 봅니다. 기도응답 받았다고 나누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은혜 받고 말씀 나눴다는 것은 없고 기도응답 받은 것 나누는 것이 없이 재물을 나눴다 말씀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생각합니다.
말씀기도는 기본으로 나눴겠지요. 그러고 나니까 물질까지 나누게 되더란 말씀입니다. 요한 웨슬러 목사님은 “나는 지갑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 형제의 회심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 받으니까 나누게 됩니다. 남의 것 빼앗아 나누면 공산주의입니다. 남의 것 걷어서 나누면 사회주의라는 말 듣게 됩니다. 오늘날 얼마나 남의 것 가지고 모아서 나누는 물론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성경적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모든 성도들이 은혜 받고 자기 것을 나눕니다.
그런데 35절과 36절 사이에 중요한 접속어 하나가 들어가야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하는데 유독, 그 무리들 가운데 바나바란 사람 한 사람의 이름만 거명합니다. 바나바가 자기 이름이 빠지면 그 많은 재물을 드리는데 시험받을 것 같아서 바나바 이름만 기록했을까요?
그건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재물을 사도들의 발 앞에 드리는데 그 중에 가장 모범이 되는 사람, 그래서 35절과 36절 사이에 그 중에 혹은 그 가운데라는 접속어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구부로에서 난 바나바 구부로는 대단히 부유한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 시대에 구리광산이 있었던 그런데서 모든 자기소유를 팔았으니 모든 그 공동체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바나바와 같은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난주에 어느 목사님과 전화하는 중에 뉴욕서 목회하시던 목사님인데 몇달전 소천하신 분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다 생각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시고도 집이 없이 렌트로 사셨답니다. 집 없는 교인이 많은데 어찌 집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교회 당회에서 그렇게 사 드린다고 하는데 마다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당회하시는데 장로님 한분이 화가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목사님, 목사님만 생각하면 어떡하십니까? 우리 장로들도 생각해 주셔야지요. 우리 장로들은 목사님이 집을 소유하시기 전에는 아무도 집을 소유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집을 소유하지 않으셔서 우리 장로들은 한 사람도 집을 사지 못합니다. 제발 우리도 집을 살 수 있도록 교회서 사 드리는 집 받으세요’ 하며 사 드렸다고 합니다. 목사님도 훌륭하시지만 장로님들도 훌륭한 분들이라 여겨집니다. 이 시대에 본이 되는 분들이라 여겨집니다.
2.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35절, “구부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사도들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합니다. 권위자란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란 뜻입니다. 위로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원어로는 휘오스 파라클레시오스, 휘오스는 아들이란 뜻이고 파라클레시오스는 위로란 말입니다. 많이 듣던 단어입니다. 파라클레토스가 성령이니까 성령은 위로자입니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성령의 사람 위로의 사람이란 말인데 그 이름을 사도들이 붙여주었다고 했습니다. 별명은 한두 번 행동으로 붙여지지 않습니다. 여러 번 반복되는 행동으로 부쳐지는 것이 별명입니다. 위로의 아들이고 성령의 아들이고 격려의 사람 바나바입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정착하며 80년대 중반에서 89년까지 직장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직장 사장님이 장로님이셨는데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35년 전이니까 그때만 해도 이민 와서 정착하는데 많이 고생하던 때입니다. 선교회 부장을 하시면서 교회를 많이 섬기신 분이십니다. 그 때만해도 이민생활에 안정된 분들이 많지 않은 때라 교우들이 일년에 수십 번은 이사하는 교우들 이사해 주시느라고 저도 이사 팀원으로 속할 정도로 이사를 많이 도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저희도 일년에 세 번까지 이사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집보다 싸고 깨끗하면 무조건 이사하던 때이니까요.
거의 60세를 바라보시는 분이 손수 성도들의 이사를 도와드리던 장로님. 물론 이사뿐만이 아니라 항상 섬기는 데는 앞장 서셨던 봉사를 많이 하시던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 장로님 말씀 한 마디면 모두 순종할 정도였으니까요. 그게 그 장로님의 권위였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권위는 섬김과 희생 헌신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임을 두고두고 깨닫게 되었던 기억입니다. 바나바가 그런 섬김의 아들 위로의 아들 권위자였다고 오늘 본문말씀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통한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섬김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바나바와 같이 섬김의 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권위를 드러내시기를 축원합니다.
3. 사람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9장 26-27절에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의 회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예수 믿는 것을 아무도 믿어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저 같아도 사울을 용서할 수 없는 적그리스도로 보았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큰 몫을 한 인물이고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게 된 것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함이었던 사울인데, 사도들이 사울을 사귀려 할 리가 만무한 일이지요 그때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추천하는 장면이지요 아마 바나바는 사울에게 이렇게 설득하고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지 않았겠나 추측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당신을 믿어주듯이 나도 당신 믿으오. 그러니까 두려워 말고 나를 따라 오시오.” 얼마나 든든한 바나바입니까! 거기다 13년 동안이나 사울은 고향 다소에 쳐져 있는 것을 데려다 안디옥에서 1년간 사역을 하며 사역자로 세웁니다. 철저히 믿어준 것이지요.
제가 미국 와서 처음 직장생활할 때 동료들에게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직원들이 일이 끝나면 거의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회식을 합니다. 회식자리에는 반드시 술이 따라오고 고민 끝에 회식자리에 안 가기로 결심하고 나니 몸은 편한데 슬슬 직원들이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고민하고 있는데 사장되시는 장로님이 부르셔서 식사를 하자고 하시며 그 자리에서 저에게 ‘김선생 많이 힘들지. 다 알아. 그런데 힘들지만 잘하는 거야’ 하시며 위로 해주시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말도 잘 못하고 있는데 ‘이제 때가 된 것 같네’ 그러시면서 언젠가 말씀드렸던 사역을 위해서 저를 신학교 가는데 많은 힘이 돼주셨습니다. 알아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세워주셨습니다.
왕따는 원래 ‘왕은 따로 노는 것’이라 하지만 왕따를 당해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압니다. 사울은 그 스스로가 만들었던 불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때 바나바는 사울을 믿어주었습니다. 믿어주고 사역자로 세워주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바나바와 사울이 최초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는데 바나바의 더 놀라운 것은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선교사로 파송 받고 선교의 무대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앞세우고 바나바는 뒤로 세우십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은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리더가 바뀌는 순간입니다. 바나바는 동행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사역에 참여하고 바울이 선교팀장으로 올라서게 되는 장면입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때 믿어주어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잊혀져가는 순간에 데려다 사역자로 세워서 안디옥에서 같이 사역하는 중 선교의 부름 받고 동행하다가 바울을 앞세우고 바나바는 팀원으로 사역에 참여하며 끝까지 세워주는 바나바의 이 삶이야말로 성령에 크게 감동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모범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한결같이 섬기며 끝까지 주의 일에 헌신하며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워 나가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 오늘날 이런 위기의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그런 사람 되라 하시는 성령의 음성으로 들려져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행11;24)라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큰 무리가 주께 더해졌다 하셨는데, 여러분들 통하여 많은 무리가 주께 더하는 역사 있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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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8.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