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성도의 관계

호세아 6장 1, 2절
정기태 목사

(뉴욕새벽별장로교회)

호세아서는 소선지서에서 제일 먼저 나옵니다. 호세아가 이 책의 저자라는 주장은(호1:1) 별다른 이론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는 주전 8세기 중엽에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아모스의 사역 도중이나 또는 직후에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호세아는 그 적을 앗수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호7:11; 8:9; 10:6; 11:11). 호세아는 선지자들 중에서 북이스라엘왕국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원초적으로 북이스라엘 왕국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비극적인 종말기에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여섯 명의 왕들(여로보암 2세를 이은 왕들)이 25년간을 지배하였습니다(왕하15:8-17:41). 네 명의 왕들(스가랴, 살룸, 브가야, 베가)은 그들이 왕위에 있을 때 그 계승자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한 명(호세아) 왕은 싸움터에서 포로가 되었으며, 오직 한 사람 ‘므나헴’만이 그의 아들에게 왕위를 양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셔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가 ‘진노하심으로’ 제거하신 이들 왕들은(13:11) ‘물 위의 거품같이’ 떠났습니다(호10:7). 피 흘림이 피 흘림을 낳았습니다(호4:2). 

‘호세아’ 왕은 초기에 앗수르에 굴복하였으나 디글랏 빌레셀 사후 반 앗수르 정책을 펴다가 드디어 주전 722년 살만에셀의 침입을 받아 사마리아는 함락되었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하여 북 이스라엘 왕국은 종말에 이르게 됩니다.

호세아서 전체의 말씀의 내용을 보면  1. 음란한 아내와 신실한 남편(1:1-3:5), 2. 음란한 이스라엘과 신실한 하나님(4:1-14:9)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본문을 말씀을 시작하면서 앞장인 호5:15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에서는 여호와로부터 징벌을 당한 이후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갱신과 회개운동이 있을 것이고 여호와께서 그때까지 기다리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절 이하는 1인칭 복수로 주어가 바뀌어 있으며 신앙갱신과 회개운동에 대한 권면과 회복에 대한 호세아 선지자의 권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호세아가 자신의 세대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심정으로, 또한 훗날 죄로 인해 더 큰 고난을 당할 후세대 백성들에게 회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자 기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폭 넓게는 장차 일어날 회개운동의 양상을 내다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서로 권면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예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호세아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되돌릴 수 없는 일로 전제하고 이러한 멸망의 와중에서도 개인의 구원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을 선포함과 동시에 구원은 반드시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보편적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내용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성도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하는 관계입니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문자적으로 ‘너희는 걸어서 올지어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오라’로 번역은 어원상 걸어가는 행위를 지칭하는 동사의 2인칭 복수명령형으로서, ‘너희는 걸어가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죄악의 자리, 범죄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에 해당하는 원형은 5:15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곳으로 돌아갈 것임을 나타낼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단어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도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합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5, 6). 

성경에서 성도는 포도나무인 주님께 붙어 있는 포도나무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주님과 떨어지면 말라져 버려지는 가지와 같습니다.

호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원래 하나님의 품에 있으면서 평안함을 누리던 자들이었지만 여호와를 떠나버렸습니다. 마치 고멜이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갔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떠나 바알을 중심으로 한 이방의 각종 우상들을 오래 동안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결국 그들에게 여호와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죄에 대해 여호와께 이미 심판을 당했든 아니면 아직 심판을 당하지 않았든 원래 있어야 할 곳을 떠나 엉뚱한 곳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속히 그들의 영적 고향인 여호와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이러한 촉구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상기해야 할 권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어느 곳에 계십니까? 하나님과 떨어져 있습니까?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하나님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회개, 기도, 예배, 말씀,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오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둘째,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징계하고 회복시키시는 관계입니다.

 

1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본문은 훗날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통해 당하게 될 극심한 고난, 즉 멸망과 포로 상황을 상정하고 그 후에 여호와의 회복하심의 은혜가 있을 것을 예언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개역개정판 번역으로는 분명히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상 본문은 이유 접속사 ‘키’로 시작하는 문장으로서 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줍니다. 비록 죄로 인한 이스라엘의 국가적 멸망은 불가피하지만 그 후에 여호와의 회복의 은총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본문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우리를 찢으셨으나’에 해당하는 ‘타라프’의 기본형은 5:14에서 ‘움켜’로 번역된 ‘에트로프’의 원형과 동일합니다. 이러한 일치는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사자처럼 이스라엘을 움켜쥐고 갈기갈기 찢어버리셨지만 이후 정한 시점에 이르면 치료하시는 회복의 은총을 베푸실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에 해당하는 원형은 어원상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입니다(레13:18; 신32:39), 특히 신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낮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하는 유일한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찢으신 것을 치료할 다른 세력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찢으신 상처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만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어디서도 상처에 대한 해결 받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징계는 저희가 죄로 인한 멸망 가운데, 어두움 가운데 있는 곳에서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저희를 회복시시고, 치료하시는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징계를 당할 때,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에게 돌아가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본 예언은 여호와께서 고난 중의 이스라엘을 회복케 하시되 조속한 시일 내에 그들에게 회복의 은총을 누리게 할 것을 강조하는 예언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구속사적 측면에서 기독론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속히 회복케 하시는 것이 일차적 의미라면, 이 예언의 이면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 예언을 기록하면서 이와 같은 기독론적 성취를 알았는지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미 완성된 구약은 물론 신약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기록자들이 비록 알지 못했던 사실까지 신약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기독론적, 혹은 종말론적 해석을 끌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5:3, 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일컬어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사흘 만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다는 구체적 언급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을 요나가 밤낮 사흘 통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건과 연관시켰지만(마12:40), 본 절의 사흘 만에 일으킬 것이라는 예언도 그리스도의 사흘 만에 이루어진 부활을 예언한 충분한 구절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이틀 후에’ 그리고 ‘셋째 날에’라는 표현에서 ‘둘’, 혹은 ‘셋’이라는 숫자는 구약성경에서 수나 양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많이 쓰였습니다(욥5:19; 잠30:15).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틀 후에’, 그리고 ‘셋째 날에’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조속한 시일 내에 그리고 확실히 회복시킬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 절의 말씀은 금요일 오후에 무덤에 묻혀 토요일 하루를 지내고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시간은 날짜로 보면 사흘이요, 시간으로 보면 이틀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본문의 ‘이틀 후에, 셋째 날에’ 일으킬 것이라는 예언은 구속사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예언에 포함시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 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소생시키신 결과 그들이 경험하게 될 일을 나타내는 예언입니다. ‘우리 그의 앞에서 살리라’에 해당하는 원형은 본 절 서두에 나오는 ‘우리를 살리시며’에 해당하는 단어의 원형과 동일한 원어입니다. 

이는 어원상 목숨을 스스로 유지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사역의 의미, 누군가가 살게 하는 것, 살리는 역사로 인해 생명을 영위함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본문에서는 미완료 1인칭 복수로 쓰였으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생의 역사로 살아나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될 것을 강조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살 것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더 이상 우상을 쫓지 않고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외적상태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영적상태까지 회복될 것임을 나타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았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갑니다. 저희 모두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 날마다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첫 번째, 성도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하는 관계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징계(사랑)하고 회복(사랑)시키시는 관계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chungkitae@yahoo.com

 

06.20.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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