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소식 앞에서

느헤미야 1장 1-11절
이지용 목사

(뉴욕겟세마네교회)

온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19으로 몸살을 겪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며 먼저 보내야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도 온라인으로만 가능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므로 이별도 생이별을 해야 하고 고난이라면 고난이지요.

왜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제 너희의 앞길이 탄탄대로가 열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셨을까 생각하며 고난에 대해서 나누길 원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일 또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인생은 갖가지 변수로 가득합니다. 고난의 경중은 다 다르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고난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회오리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누구나 당하는 고난, 고난 자체보다는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에 대한 잘못된 반응으로 인생에서 더 큰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그 고난을 이기려면 적절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적절한 시간이 지나면 감정이 정리되고 고난이라는 긴 터널 속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는 비로소 수용에 단계에 이릅니다. 고난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태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큰 역풍을 만나게 됩니다. 고난의 풍랑은 거칠고 혹독합니다. 삶에서 고난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든지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지혜롭고 건강하게 하는 법은 고난과 함께 뒹굴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인생을 더욱 활기차게 합니다. 신앙인들에게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또한 고난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게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의 고난 극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고난을 은혜롭게 극복하시길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포로귀환 시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역사서(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중의 하나입니다. 에스라서는 1차 포로귀환으로부터 3차 포로귀환 적전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룹니다. 곧 스룹바벨의 성전건축 이야기(학개와 스가랴)와 에스라의 신앙 개혁을 중심으로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과 재건 과정을 다룹니다. 이후 느헤미야는 3차 포로귀환부터 BC 400년경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룹니다.

느헤미야의 핵심은 예루살렘 성벽재건과 개혁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재건입니다. 느헤미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1-7장까지이며 느헤미야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벽재건에 대해 다룹니다. 두 번째는 8-13장으로 이스라엘의 언약갱신과 영적개혁에 대하여 다룹니다.

 

1. 고난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벽소식과 남은 자의 소식을 듣습니다.

 

모든 집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습니다. 먼저는 내가 사는 곳에 대한 지역의 표시이며, 외부 침입에 대한 방어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는 성역의 표시이며, 세상의 죄와 오염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귀환을 하고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 된지 73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성벽이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그 상황을 3절에서 설명합니다.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혀 쇠사슬에 묶여 애굽으로 끌려가고, 이스라엘 귀족과 유능한 젊은이들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고, 유다에 남은 자들은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만 남게 된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했던 당시 모습과 유사합니다.

바로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리라 상징이 되는 성벽이 재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재건해야 할 성벽은 무엇입니까? 세상과 구별되어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영역은 무엇입니까? 예배의 성벽입니까? 주일설수의 성벽입니까? 십일조의 성벽입니까? 술과 담배의 성벽입니까? 우상숭배의 성벽입니까? 성결의 성벽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영역의 성벽을 재건하는 기도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우리의 삶이 허물어지고 불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만사형통의 인생이 되길 축복합니다.

 

2. 고난의 이스라엘 고국소식을 듣고, 울며, 슬퍼합니다(4절).

 

예루살렘의 피폐한 상황을 느헤미야가 들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무너져 내린 우리의 현실의 모습을 들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당한 상황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성벽이 무너지고 불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에게 아무런 소망과 희망이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죄인 된 모습에 울 수밖에 없고,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내 자신의 연약함에 울 수밖에 없으며, 70여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는 성을 보며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나를 보며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내면에 깊은 슬픔이 찾아옵니다. 이 슬픔은 나는 누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분별의 시간입니다. 나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온 우주의 주권자이심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이라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통치하신 주권자임을 그는 듣고, 울며, 슬퍼함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하나님 앞에 나와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임을 그는 명확하게 분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들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책임지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3. 고난의 소식을 듣고, 울며, 슬퍼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5절)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명확하게 이해하며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내 기도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주권에 대한 인정을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의 출발입니다.

그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의 능력보다 더 강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닌 두려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는 주인과 그 권위에 대한 친밀감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며 순종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주인의 성품을 경험하고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균형 있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한 부분만 바라보고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만 생각하니 내게 사랑이 아닌 다른 모습이 비쳐질 때, 낙심하게 되고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고,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시간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을 공부하고 그것을 기도함으로 인해 내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하나님에 대해 균형 있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1)분리가 아니라 공감의 기도입니다(6-7절).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자손의 죄가 자신의 죄로 받아들이며 회개합니다. 그들의 악행이 자신이 하나님께 저지른 악행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불순종이 자시의 불순종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무너진 성벽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세워가는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세에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무정’입니다. ‘무정하다’는 뜻은 공감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타인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 고통은 전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을 세우는 자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공감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타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합니다. 타인을 통하여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2)말씀에 기초한 기도입니다(9절).            

느헤미야의 기도는 자신의 감정만을 토설하는 감정의 배설 창구가 아닙니다. 내 억울함만을 호소하는 탄원 창구도 아닙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소원 창구도 아닙니다. 철저히 말씀에 입각하여 기도하는 말씀의 자리입니다. 말씀만을 가지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내용은 무엇입니까? 느헤미야처럼 말씀을 토대로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읽어야 하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도님들에게 도전을 드립니다. 2020년 올해 안에 최소한 성경 2독을 하십시오. 하루 6장이면 2독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예배시간에 들려지는 말씀을 메모하십시오. 그리고 그 메모를 보면서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지금 위치는 어디입니까? 우리 모두 느헤미야처럼 술 맡은 관원에 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벽을 재건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 위치에 맡는 자리에 있게 하십니다. 교회에서는 직분의 자리요, 섬김과 헌신의 자리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 자녀의 자리입니다. 세상에서는 직장인, 사장의 자리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위치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셔서 내게 허락하신 위치임을 인정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헤미야처럼 “듣고, 울고, 슬퍼하고, 기도하며” 서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무너진 성벽들을 하나씩 하나씩 세워 가실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절에는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은 계속 될 것 같지만 고난이 끝나고 나면 기쁨과 환희 순간이 옵니다. 마치 긴 겨울이 지나면 봄날이 오듯이 슬픔이나, 고난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은 축복의 선물을 가져다주는 축복을 싼 보자기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과정은 아픈 것이지만 인생의 한계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우리 인생 길잡이도 되고 교사도 되기도 합니다. 바닷가에 조약돌을 보면 거친 돌조각이 바다에 떨어져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다 보니 그렇게 부드럽고 예쁜 조약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인격도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나의 모난 부분을 깨뜨리십니다. 그래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드십니다. 

성경에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을 보면 아브라함도, 야곱도, 다윗 그리고 욥이 그랬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은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하며 그의 남은 인생을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난의 무게를 견디려면 영적 힘을 길러야 합니다. 고난이 삶을 짓눌러도 영혼은 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은 면하게 주시기보다는 고난가운데서 그 고난에 함께 동참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다 아시고 이해하십니다. 알 수 없는 고난이 있듯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고난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nygo4tgc@yahoo.com

05.0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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