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변화의 비결

요한복음 4장 3-30절
육민호 목사

(뉴저지 주소원교회)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과 대화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 앞에 등장하는 수가성 여인의 모습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남들이 찾지 않는 시간에 우물가에 물을 길러온 주눅 든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후 수가성 여인은 28절의 고백처럼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이처럼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수가성 여인은 우물가에 온 목적도 버려두고, 스스로 피해왔던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 먼저 말을 전하는 자신에 찬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무엇이, 어떠한 이유로 수가성 여인은 변화하게 된 것일까요?

어제 저녁 9시를 기준으로 뉴저지 지역에도 가급적 집안에 머무를 것과 사업체를 향한 영업정지가 발효되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연함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할까요?

오늘 수가 성 여인의 변화의 비결을 살펴보며 우리의 삶에 들이치는 막연함과 두려움을 내어버리고 담대함과 기쁨으로 살아가 현재의 모든 상황을 잘 이기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수가성 여인의 변화의 비결은 

 

1.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본문 3-4절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구절을 영문으로 살펴보면 “Had to go” 즉 have to go입니다. 사마리아로 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우연하게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이 만난 것이 아니라 수가성 여인을 만나고자 했던 예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함께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는 없지만 이처럼 함께 영상을 통해 주님의 말씀 앞으로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증거하는 말씀처럼 말씀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즉 말씀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 20절 말씀을 살펴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 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처럼 우리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거룩한 성전임을 깨달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주의 일을 이룰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에게 세상에 속한 문제와 관점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 질문을 보면 △당신은 유대인인데 왜 사마리아인인 내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시대적 상황 속에 자존감이 상실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0절에 예수님은 내가 누구인줄을 알았더라면, 나에게 도리어 생수를 구할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그 당시 풍습을 들어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당신이 어디서 그 생수를 얻겠습니까? 라고 말하여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큽니까?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에 예수님을 시간적, 공간적 제한 안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기에 그러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그러나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어떠할 지라도 현재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심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 자존감입니다. 이러함 가운데 여인의 변화된 모습처럼 삶 가운데 승리를 경험하고 감사함과 즐거움이 넘쳐나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2.  참된 영적 소망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영적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빌립보서 2:13-14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소원함을 두고 일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의 소원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십니다. 

로마서 4장을 보면 아브라함을 가리켜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헬라어 원문은 “소망을 거슬려서 소망 중에 믿었으니”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소망은 육적이며 세상적인 소망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두 번째에 언급된 소망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한 영적인 하늘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생각을 초월하고 극복하여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늘의 신령한 소망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바랄 만하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런던의 한 길모퉁이에서 구두를 닦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해 구두를 닦아야 했습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밤 늦게까지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으면서도 그 소년은 얼굴에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늘 노래를 부르는데 밝은 노래만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구두 닦는 일이 뭐가 그리 좋으니?” 그때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즐겁지요. 저는 지금 구두를 닦고 있는 게 아니라 희망을 닦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이 바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세계적인 작가 찰스 디킨스입니다. 찰스 디킨스는 환경에 지배를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의 소망을 따라 세계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수가성 여인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의 계속되는 대화 속에서 드디어 그녀는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점점 깨달아갑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세상에 속한 질문이 아닌 자신의 내면 속에 갈망하던 질문을 내어놓습니다. 

사실 사마리아 여인은 상처 많은 과거와, 많은 죄의 문제를 안고 있었고, 여전히 삶의 여러 문제들, 비참과 곤고함을 짊어진 채로 살아가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수가성의 이 여인은 매일매일 고단한 삶을 쉼 없이 살아가야 하는 모든 고단한 인생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면 깊숙이 영적인 갈망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갈망함을 이 여인은 예배에 대한 소망으로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수가성 여인을 예수님은 찾아오셨고 마음 속 간절한 소망에 응답을 하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대하여 4;24절을 통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어다”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19으로 모두가 고통 받고 있는 이때에 아무리 먹구름이 짙어도 그 먹구름 뒤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과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어린 찰스 디킨스가 손님들의 반짝거리는 구두 코 위에서 희망의 별빛을 보았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은 것처럼,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수가성의 여인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을 믿어 함께 동행하며 참된 소망을 품고 간절히 간구하여 예수님을 바로 알아 참된 기쁨과 즐거움의 한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astoryuk@gmail.com

04.0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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