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Ⅰ: 복 누림의 서막

마태복음 4장 23절-5장 12절
이수용 목사

(한몸교회)

한국의 유명한 고사성어 중에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다. 둘 다 ‘화가 바뀌어 복이 된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복의 정의는 ‘복이 복이 아니고 화가 화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곧, 세상은 ‘복에 대한, 화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 팔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써 이 땅에 허락하신 복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3가지로 살펴보자.

 

1. 복 누림의 바른 정의

 

마태복음 5장-7장은 기독교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낸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하신 설교이다. 산상수훈이라 불리는 이 설교의 핵심은 ‘팔복’이다. 예수님이 산상설교의 첫 시작을 ‘팔복’으로 시작한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해낼 구원자(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태는 앞서 1장-4장에서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임을 족보, 탄생, 마귀의 시험 및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그 뒤로 예수님이 이 땅 공생애 사역의 첫 일성을 외치는데 그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예상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으로 무엇을 해야 함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소유나 능력이 아니라 ‘성품’이라고 얘기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기 위해서는 심령의 가난, 온유, 애통... 이 상태, 이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복의 누림’을 이렇게 정의한다. 복은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느냐(to have)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to be)이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것을 갖고 있어도 성품이 온전하지 않으면 행복을 누릴 수 없고, 성품이 온전하다면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그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 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꿈을 가져야 행복하다’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꿈은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꿈은 단지 우리를 보람되게 만들 뿐이다. 진정한 행복은 내 인생의 꿈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에 있지 않고, 내 삶을 내가 바로 해석할 수 있는 성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이루어낸 사람보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훨씬 행복하다. 왜냐하면 꿈을 이루었을 때는 그 꿈이 이미 ‘소유’가 되어버렸지만 꿈을 향해 달려가는 마음은 ‘성품’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복에 대한 바른 정의가 필요하다. 이 행복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을 이루어도 잘못된 것이기에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이루지 못하면 못 이루었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힘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무리 or 제자 

 

본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무리’와 ‘제자’이다(1절). 예수님을 따르지만, 즉,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지만 그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 일반적으로 ‘무리’와 ‘제자’를 이렇게 구분한다. ‘무리’는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고 ‘제자’는 훈련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무리와 제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열심’이다. 무리이건 제자이건 할 것 없이 이 두 부류 모두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함에는 열정과 열심히 대단하다. 둘 다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좇는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리’는 예수님을 좇는 목적이 개인적인 욕구와 만족을 채우기 위함이고 ‘제자’는 자신의 삶의 방향과 지표가 예수님께로 바뀐 사람들이다. 

 

<9면으로 계속>

<4면에서 계속>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자기의 열심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기도 많이 해서, 헌금 많이 해서, 성경 많이 읽어서 자기가 생각하는 필요한 것을 얻는 것은 복이 아니다. 그것은 대가(price)이다. 대가는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복음은 방향의 전환이다. 어떤 종교적 열심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 방향의 전환이다. 신앙의 수준에 따라 그 길을 천천히 가거나 빨리 갈 수 있다. 다만, 방향이 바뀌어 있으면 된다. 누구에게로? 예수님에게로다. 만일 이것이 바뀌지 않은 채로 내가 열심을 낸다면 반드시 실망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의 정의와 다르다. 성경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는 것이 옳은 길이요. 우리가 가야할 복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리인가? 아니면, 제자인가? 진지한 질문이 필요할 때이다.

 

3. 모세의 산 vs. 팔복의 산

 

이 ‘팔복의 산’은 상징적으로 ‘모세의 산’과 비교되는 산이다. 모세가 12지파 사람들을 이끌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 그 계명은 오랫동안 우리를 족쇄에 묶고, 절망과 좌절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모세의 산이다. 반면에 팔복의 산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사 새 계명이 선포된 산이다. 그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다. 우리는 우리를 옭아 매였던 율법의 족쇄에서 더 이상 노예 되지 않고 풀려나게 되었음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의 모세의 산은 백성들이 오르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그 산을 밟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다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복의 산은 제자들이 올랐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직접 듣고 있다. 무슨 뜻인가? 이 말은 곧, 이제 예전에 율법으로 인하여 죽음의 권세 아래 눌려있던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 놓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내산으로 상징되는 ‘율법의 저주’와 팔복으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이 은혜’ 이 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에서 놓임을 받는, 그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제자들은 그 엄청난 선언이 선포되어지고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데 본인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이다. 그들의 행위와 공로와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그것을 깨닫는 자만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준비해 놓은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생각하는 복과 성경의 복의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어떤 복을 받고 싶은가?

3. 내가 성경이 말하는 성품으로 바뀌어진 눈으로 본다면, 지금 내게 있어 제일 감사한 것은 무엇인가?

4. 나는 ‘무리’인가? 혹은 ‘제자’인가? 그렇게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5. 내 인생의 방향은 무엇이었는가? 그 길로 계속 가게 되면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6. 내가 이미 복을 받은 자라고 생각하는가? 가장 크게 받은 복은 무엇인가?

7. 내가 이미 받은 복을 누리고 있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02.0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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