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장로교회)
현대인의 인생은 마치 숫자로 표현되고, 숫자로 인정받고, 숫자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학교의 평점과 SAT, GRE 점수가 학생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또한 나의 신용점수는 집과 자동차 구입의 융자 이자율을 결정합니다. 혈압의 숫자와 콜레스테롤 치수, 몸의 당 치수 등은 그 사람의 건강상태를 판단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0과 10 사이에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나의 예배자로서 숫자는 어떨까? 퍼퍽트10에 가까울까, 아니면 형편없는 제로에 가까운가? 마틴 루터에 의해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하나님 말씀의 본질적 의미를 되찾게 했습니다. 더 나가서 교회만 아니라 문화, 학문, 경제, 정치, 교육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큰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즉 종교개혁은 삶의 개혁입니다. 그리고 삶의 개혁은 참된 예배에서 나오는 힘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시편 15편은 24편과 함께 다윗과 그의 신하들이 법궤를 기럇 여아림(수15:9)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을 보고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자신의 성으로 옮기면서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 궤를 옮기던 소들이 뛰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웃사가 손을 들어 궤를 잡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웃사의 잘못에 진노하셔서 웃사가 하나님의 궤 옆에서 죽게 됩니다(삼하6:1-23).
흔들리는 법궤를 잡으려고 했던 웃사의 행동은 인간적으로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보면 죽을죄를 지은 것입니다. 레위 자손 중 심지어는 고핫 자손이라 할지라도 법궤는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민4:15). 또한 아무도 법궤를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민4:20). 이런 하나님의 엄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웃사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불순종한 죄의 대가로 죽은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돌아보며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까"라고(1절) 외치면서 이어서 2절로부터 5절에서 삶의 개혁을 원하는 참된 예배자의 퍼퍽트 10인 삶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정직한 행동으로 살아갑니다.
주의 장막에 머무르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며"(2절)라고 합니다. 예배자의 삶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나타난 품행이나 행실이 흠 없이 정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흠이 없는 정직한 예배자는 나쁜 친구를 본받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4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서 뿐 아니라 사회에서 보면 바람직한 친구관계도 있고 품위가 떨어지는 친분관계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셨지만 항상 예수님의 친분관계는 회복과 구속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악한 자들을 멀리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밖에 있는 사람들을 본받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고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람직한 친구관계입니다.
반면에 성도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그런 친분관계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고 하면서 세상과 벗이 된 것은 간음하는 자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 세상의 노래가 더 좋아서 늘 세상 노래를 즐겨들으며 콧노래로 부른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보다는 세상의 책이나 드라마나 영화가 더 좋아서 그것에 몰입을 한다든지... 더 나가서 사람 사이를 가르며 분쟁하는 자들과의 친분관계는 성도의 품격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가르침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롬16:17)고 명령합니다. 참된 예배자로서 세상과 벗하지 않고, 분쟁과 불순종의 사람들을 본받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정직한 예배자는 좋은 믿음의 친구로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4절). 말라기 선지자의 때에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백성들의 종교적 삶이 밑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에 부정한 제물을 드리며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하기에 이른 것입니다(말3:8-9). 하지만 말라기 3장을 계속 읽어보면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말3:16).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며 모인 성도들의 아름다운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에게도 즐거움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했습니다(3:3). 여기서 '의합한다'는 의미는 흠이 없는 정직한 행실과 믿음의 교제로 서로 뜻을 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의합한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말씀합니다(행2:42). 또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1:6-7)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암흑과 혼동, 그리고 쇠퇴하여 약해져가는 믿음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외하는 흠이 없는 정직한 예배자들이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에서 깨끗함을 입고 서로에게 좋은 믿음의 친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공의로운 일을 합니다.
주의 장막에 머무르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는 공의를 실천하며"(2절)라고 합니다. 공의를 실천하는 참된 예배자는 도덕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4절).
본문의 의미는 매우 날카로운 뜻이 있습니다. 다윗은 의인이란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이 해를 입고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고 변치 말고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지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서원을 하였기에 그 대가가 어떤 것이라도 책임을 지는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 이런 도덕적 태도와 책임감을 보인다면 교회뿐 아니라 사회도 큰 변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사로잡았던 엘람왕과 동맹한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아브람은 그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바치고 멜기세덱은 축복을 합니다. 이때 소돔왕은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창14:21)고 제의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소돔왕이 나중에 ‘내가 아브람에게 물품을 주어 그가 부자가 되게 하였다‘라고 말하게 되면 하나님이 복 주신 것에 대한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이기에 하나도 취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이 나에게 금전적인 손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내가 가지고 쓰기보다는 하나님께 드리고, 약속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아 부하게 되었다는 믿음의 자세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는 세상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5절). 돈에 대한 그릇된 태도를 지적한 것입니다. 성경은 돈이나 어떤 물건을 빌려주고 터무니없는 엄청난 이자를 받는 것을 율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출22:25, 레25:36, 신23:19).
변리 이자는 가난한 자들을 파괴적으로 착취하며 부정직한 사업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화에 보면 돈을 꾸어준 사람이 정직하고 성공적인 사업을 하면서 이윤을 보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시편 말씀은 고리대금업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의 상황을 악용하는 사업적 수완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변리로 돈을 취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돈을 높은 이자의 신용카드에서 취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습관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번 돈이 아닌 쉽게 쓸 수 있다고 유혹하는 변리의 신용을 의지하여 고가의 주택, 비싼 자동차, 명품만 선호하던 소비 만능주의로 우리들이 얼마나 지금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계속해서 5절에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은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자"라고 말씀합니다. 당시의 뇌물과 부정부패는 현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재판장이나 증인으로서 뇌물을 받고 무죄한 사람에게 불리한 일을 행하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율법의 요구로부터 구속하고 면해 주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하여"(롬8:4)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계속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엽기적인) 변명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도덕률초월론)는 윤리적 책임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삶을 거룩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산제사로 드리겠다고 말한다고 해도,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사업의 일터에서 바르게 실천하지 못한다면 참된 헌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삶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3.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진실된 말을 해야 합니다.
주의 장막에 머무르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는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2절)라고 합니다.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예배자의 삶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보이는 행동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또한 사업과 직장의 일들도 상대를 기만하며 속일 수 있지만,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약3:2) 말씀합니다.
이윤과 이익을 위하여 허구와 거짓이 난무하는 상업주의 시대에 "광고의 진실성"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한다'는 의미는 어떤 오류나 과장이 없는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가운데 진리가 되신 예수님(요14:6)이 내재하실 때,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10:5)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도 믿으시기 바랍니다(엡4:15). 대중 전달의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는 세상에서 진실을 말하는 성도의 가치는 참 소중한 것입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팜보스‘라는 수도승이 스승에게 시편을 한 절씩 읽으면서 글을 배웠습니다. 어느 날 시편 15편 2절 말씀을 배우고 "배운 대로 지키겠다. 앞으로는 나의 입으로 거짓을 말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갔습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도 글을 배우러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수년이 지난 후에 스승이 왜 다른 구절들을 배우러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진실만을 말하며'라는 말씀을 마스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죄에 연약한 나는 할 수 없지만 진리의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늘 진리의 정직한 말만 할 줄 믿습니다.
예배자의 말은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2절). 내적 영의 삶과 외적 육신의 삶은 서로 일치해야 합니다. 입술의 말로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거짓말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녀 자랑을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너무 좋으시겠어요'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마음으로는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우리의 말은 생각과 마음의 깨끗한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거짓말하는 위험을 늘 자각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감추는 것 없이 항상 정직하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진정으로 자비의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하여 3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즉 상대방에 대하여 험담하지 않고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않는 것이 자비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 앞에서는 겉으로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돌아서서는 그 사람에 대하여 험담하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자비로운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 남의 비밀을 말하고 싶을 때는, 말하기 전에 세 가지 소중한 관문을 통과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이 말이 사실일까?" 둘째, "이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마음으로 진정한 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이 따뜻하고 친절한 말인가?"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배하는 사람이 주님의 성전에서 평안히 거하며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진실 된 교제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경험은 예배자의 행실과 예배자의 일과 예배자의 말이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다윗은 5절에서 결론적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Perfect 10의 예배자는 Perfect 10의 인생을 살아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참된 예배자로 삶을 개혁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결코 흔들림이 없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schang@bostonkorea.org
10/26/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