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는 회복하는 자입니다

요엘서 2장 32절, 로마서 11장 4, 5절
원영호 목사

새장로교회

요즈음은 시대가 많이 혼탁해져서 전통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상식과 비상식이 구별이 안 되는 혼란 속에 사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최소한의 절대적인 기준도 제대로 지키기 힘든 경우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무엇이 공의이고 정의이고 선인지를 구분하기가 힘들어져 가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군중이 그런 혼란을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판단하거나 시정을 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개인 이기주의와 절대 가치관의 파괴로 인한 결과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부르신 ’남은 자‘에 대한 관심과 선택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가 되고 말았습니다. 

 

1. 남은 자란 누구일까요?

원래 ’남은 자‘란 뜻은 ’어떠한 일 이후에 남겨진 사람‘이란 뜻으로 성경에서의 의미는 구약시대에 패전으로 인해 백성들이 자기 나라에서 추방되거나 끌려간 후 본토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남은 자’ 사상을 이야기하였고, 스바야 선지자는 ‘겸비하여 주를 찾는 자’라는 정의로 남은 자를 지칭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5).

오늘날 ‘남은 자’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끝까지 거룩한 길을 선택한 백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운좋게 살아남은 자가 아니고, 고집이 세서 끝까지 우기고 거기에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고집하면 생각나는 성씨가 있습니다. 안씨, 강씨, 최씨가 고집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고집의 대명사가 되어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서로 자랑을 했답니다. 한 아이가 말하기를 ‘우리 아빠는 잠수하면 5분 이상 견디셔.’ 그러니까 다른 아이가 말합니다. ‘5분 가지고 뭘, 우리 할머니는 15분간 잠수하셔, 해녀출신이시거든.’ 그러자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걸 가지고 뭔 자랑을 하냐? 우리 삼촌은 작년에 바다에 들어갔는데 아직도 안 나왔어.”

남은 자는 잠수를 오래하는 고집이 있는 자도 아니고 내 의지와 내 욕심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남은 자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선택받은 소수가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면서 반드시 남은 자를 두시고 사용하십니다. 

그 자리에 머물러 남은 자가 될 때, 우리가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남은 자로 택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있는 현 위치에서 남은 자로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인가? 내가 섬기는 이곳이 하나님이 내게 맡기시고 걸어가라고 하신 그 장소인가? 내가 섬기는 교회가, 내가 섬기는 교단이 하나님이 나에게 남은 자로 섬기라고 하신 곳인가? 

믿음이 올 때에 남은 자가 되어서 섬겨야 합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그 자리에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2. 남은 자는 회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은 자가 되어서 과연 할 일은 무엇일까요?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남은 자는 스스로 먼저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힘든 일입니다. 손가락질 당하고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시대의 조류를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듣기에 거북한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쓴 소리를 하고 남과는 다르게 구별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길을 가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좀 지혜롭게 살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남은 자의 삶은 하나님이 부르신 삶이기에 구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느니라”(습3:13). 

성경에 보면 각 지방에서 시대에 따라 하나님이 남은 자로 부르셔서 쓰임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노아가 그렇지요. 대홍수에서 남은 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스 땅의 욥은 인내의 표본으로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축복이 없고, 고통이 없는 성공이 없고, 고독이 없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 엘리야에게 주셨던 말씀은 구체적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하나님은 새 역사를 창조하시면서 남은 자를 필요한 곳에 부르시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한국 선교사에 보면 남은 자들을 하나님은 쓰셨습니다. 그 중에 서서평 선교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젊은 나이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한국 땅에서 남은 자로 섬겼습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고 가고 싶어 하지도 않던 나라인데 마음에 품고 32살이 되던 해에 미혼의 몸으로 미국 남장로교의 파송을 받아 캄캄한 미개의 땅으로 향해 떠납니다. 그리고 전라남도 광주와 제주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1921년에 내쉬빌장로교 선교부에 보낸 선교보고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이 넘는 조선여성들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되었습니다. 조선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 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중 하나입니다.”

자신은 어머니한테 1살 때 버림을 받고 할머니에게 맡겨져 키워졌지만, 그리고 48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가서 낳아준 어머니를 만났지만 어머니가 ”네 몰골이 내 딸이라 하기에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는 말로 두 번째 버림을 받는 아픔을 받았지만, 그 아픔을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으로 채우면서 수양딸을 13명을 길러냈습니다. 

한복에 고무신 신고 평생 병들고 가난한 조선인, 특히 나환자들을 섬겼던 그녀는 1934년 6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남긴 것은 담요 반 장, 동전 7잎, 강냉이 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이었던 담요를 반 장을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누었기에 반 장이 되었고, 본인의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하였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조선 땅에서 22년간 보리밥에 김치 먹고, 고무신을 신고 조선으로 살았던 서서평 선교사,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분이 바로 오늘날 이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남은 자들이 이루어야 할 회복을 실천한 참된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회복시켜야 할 일과 대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미국 땅에 나를 남은 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응하여, 남은 자가 해야 할 일, 곧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사랑의 회복을 위해서 그 길이 힘들고 좁은 길이라도 그 길 끝에 기다리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가는 남은 자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남은 자는 회복하는 자입니다!  

 

09.2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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