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롯장로교회
제목의 말은 늦게 깨달은 진리나 당연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오늘의 사실을 예견이라도 하
듯이 미드웨스턴신학교(Midwestern Seminary) 교회개척센터 담당 디렉터인 Joshua Hedger 교수는 오늘날의 교회가 반드시 Church Revitalization(교회부흥)을 경험하여야함을 여러해 전에 설파하였다. 지금 미국에서 일 년에 4000개씩 교회 문을 닫는 참으로 어려운 때에 그 유명한 미남침례교단에서도 일 년에 800-1,000개 교회가 문을 닫는 때에 과연 이 땅의 교회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교회가 반드시 변하여야 하는데, 그 중요한 변화는 ‘교회의 Discipline’(절제를 포함한 훈련), ‘Spiritual Health’ 그리고 ‘Youth를 향한 활짝 열린 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교회는 반드시 변해야 하고 그 중요한 실제적인 예를 찾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 사역보다 더 좋은 예는 있을 수가 없다.
본문 6절은 예수님께 드린 가나안인 시몬의 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열두 제자 가운데 왜 열심당 시몬이라 하였을까? 사실은 마태복음 10장 2-4절에 나와 있는 열두 제자 이름을 네 명씩 세 그룹으로 나누는 중에 마지막 그룹에 속하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및 가룟 유다 네 사람은 다 열심당원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 중에서도 가나안인 시몬 곧 셀롯인 시몬만큼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도 계속 열심당원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것은 민족 독립이었다. 그러나 대표적인 그의 변화를 통하여 오늘의 교회 침체의 해결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1. 더 큰 비전을 가지게 된 그의 변화
당시의 열심당원들은 무서우리만큼 민족주의적이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하는 일을 방해하는 자는 가차없이 죽여 버렸다. 심지어 동족이라도 로마에 아부하여 자기들의 사역에 역행하는 것을 보면 마찬가지로 죽이어 버릴 만큼 철저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자기들 곧 정치적인 메시아가 와서 자기 나라를 로마의 압박에서 독립하여 자유롭게 하고 다시 한 번 다윗왕국을 누리게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줄기차게 기다렸다.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로 가입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예수님을 오실 메시아로 믿었고 예시님 자신도 메시아이심을 천명하였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사역은 갈수록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대단한 기대를 모으게 하고 군중을 사로잡으며, 그들의 가난과 압제와 고통과 질병을 해결하며 메시아로서의 면모를 여지없이 과시하였으나 점점 더 진행되는 그 예수님의 사역 방향은 열심당원 시몬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앞길을 종잡을 수가 없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는 그의 말씀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어 무력하게 죽은 자기의 스승 예수님, 그와 주위에게 주는 어마어마한 실망과 무력감...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러면 그렇지 무언가 다른 분이시잖아? 다시 열심히 따라가 보았으나 종래 그분의 비전은 자기들과 너무도 다른 어떤 것이었다. 본문 7, 8절 말씀처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있으니 너희의 알바가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만일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대처럼 유대를 독립시키는 메시아로 만족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온 세상의 구원은 언제 이루어질까? 생각만 하여도 아찔하지 않을 수가 없다. 셀롯인 시몬이 그토록 열망하며 기대하고 모든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그렇게 기대하였던 대로만 메시아의 사역이 끝이 났다면, 여전히 다윗왕 때처럼 주위 나라는 압제와 멸시 그리고 철저한 소외감과 천대에 시달리며 구원과는 먼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겠으나 예수님의 순수하고 진실하며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시키시는 사랑의 모범을 보이며 이루어 주신 인류 구원, 그것 때문에 온 세상이 구원을 얻어 자신이 또 가정이 이웃 지역사회와 민족 국가 더 나아가 세계 온 인류가 완전한 새 삶을 살고 참된 구원 참된 천국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난 세기에 독립을 이룬 많은 나라들이 자신들과 이웃나라에 얼마나 기쁨과 행복
을 가져왔는가? 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만든 철저한 민족주의, 국수주의를 통하여 인류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구원뿐만 아니라 참된 번영과 희망을 선사하여 이웃과 온전한 관계를 갖고 인류 공영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한 나라의 독립에서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다. 민족우월주의도 아니다.
이 시몬은 오직 나사렛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환경에서도 천국을 이루며 감사와 만족으로 살게 되는 것은 복음으로만 가능한 것을 알았기에, 특별히 성령께서 임하셔서 구원의 감격을 자신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전하여야 함을 깨닫게 하셨기에 그는 자신의 움직일 수 없는 비전, 소신, 일생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십자가의 복음의 기수가 되어 소아시아로 북 아프리카로 흑해 연안으로 심지어 영국으로 마지막에는 페르시아로 올라가 복음만 전하다가 반대하는 폭도들에 붙들려 톱으로 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지난 세기에 자국들의 독립을 최고의 가치로 구가하며 자기들만 즐기던 것과는 달리 셀롯인 시몬만 아니고 콜럼버스와 어거스틴 선교사 등 불과 너댓 명 복음의 기수들로 인하여 마침내 복음화 된 영국을 통하여 지난 한 세기에 세계 인류가 누리던 축복을 생각하여 보라. 복음을 들고 세계 곳곳을 복음화하며 인류를 사랑하고 봉사하던, 그리고 그렇게 크게 영적 감화를 세계적으로 끼치던 영국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에 더 크고 위대한 가치관으로의 변화는 백 번 나타나도 오히려 부족할 뿐이다.
2. 예수님적인 성숙
참 제자의 모습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삼년 반 동안
힘쓰고 애쓰신 바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시대가 갖는 아픔을 하늘의 가르침으로 승화시키셨음에 틀림이 없다.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두 사람 마태와 시몬을 가슴에 안고 비유컨대 무릎에 앉히시고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셨을 때, 기가 막히기도 하고 그 자리를 뛰쳐나가고픈 유혹도 느낄 수 있었겠으나 이미 성자 하나님의 삶과 가르침에 감동을 받았고 그 권위에 눌리기도 하여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복음으로 사랑으로 그의 격정적인 성격이 변하여 성숙을 이루어 누구보다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새 역사를 쓰게 된 제자 열심당원 시몬, 새로 거듭난 그 열심으로 누구 못지않은 전도의 쾌거를 이루었던 그를 통하여 보여준 진정한 모범을 따라서 이 시대의 참된 제자로 살아야 되겠다. 열두 제자를 강해하며 느낀 결론은 참고 또 참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그들의 장래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결코 지치지 않는 리더십, 그것이 예수님의 리더십이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이며 “아 이게 그거구나!” 하게 된다. 이 리더십이 다시 힘 있게 살아날 때 이 시대의 교회들은 반드시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다.
어느 수도원의 예를 통하여 우리를 돌아보고 “아 이게 그거구나!” 라고 결론을 내리려 한다.
어느 수도원에 문제투성이 수도사가 들어왔다. 걸핏하면 싸우고 시비하고 원망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 핑계하고 게으르고 도무지 그 사람이 들어온 이후에는 수도원이 하루하루 지옥 같은 삶이 전개되었다. 이때 모든 수도사가 한 가지 지혜를 짜내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대꾸하거나 상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철저히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것이었다. 견디다 못한 그 수도사가 어느 날 짐을 꾸려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다. 남은 수도사들의 보기 좋은 승리였다.
대표 수도사가 원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되었노라고. 그러나 아무 말씀하지 않고 듣고 계시던 원장님은 날을 잡아 수도원을 내려가시더니, 여러 날 후에 바로 그 사람을 대동하고 다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닌가? 원장님을 따라 들어오는 그 수도사의 당당함은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밤에 쫓아와 항의하는 대표 수도사들에게 원장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그를 수소문하여 어렵게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오지 않겠다고 하여 많은 월급을 주기로 하고 데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를 통하여 우리가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는, 그래서 꼭 고쳐야 하는 약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스승입니다.”
권위에 눌려서도 그 자리를 나왔으나 그 깊은 가르침에 큰 감동을 받은 수도사들은 이튿날부터 자세를 바꾸었다.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 저 사람을 통하여 반드시 나의 약점을 발견하고 고쳐야 한다. 고맙게까지 느끼게 된 그 동료 수도사들의 달라진 태도에 정작 놀란 것은 문제아 수도사 자신이었다. 과거와 달리 그렇게 고분고분하고 겸손하며 약점을 함께 지려는 피나는 노력에 그만 마음이 녹아내리게 된 이 문제아 수도사는 누구보다도 자기를 반성하고 누구보다도 훌륭한 수도사가 되어 역사에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문제는 나에게, 나부터 작은 예수! 오늘의 교회를 누가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인가? 예수님 앞에서 그분의 고귀하신 구속의 사랑을 본받아 내 뜻, 내 주장, 내가 오래토록 붙들고 있던 가치관, 내가 평생에 가지고 있던 비전.. 그것까지라도 복음의 우선순위 앞에 다 내려놓을 때, 그리고 예수님적 성숙이 이루어져 우리 모두 작은 예수로서 살아갈 때 우리는 미래의 우리 교회들의 확실한 변화와 성장을 경험하고 새 역사를 일으키며 이 시대의 분명한 해답을 교회가 제공함으로 Church Revitalization을 확실히 이루고도 남을 것이다.
revskma@gmail.com
09.07.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