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 한인개혁장로교회)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을 역임한 지미 카터에게 해비타트 운동을 하며 손수 집을 짓는 노동에 참여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나는 한 채의 집을 지을 때마다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세워주기 위해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연약한 그의 자녀들을 바로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섬기는 일은 이웃의 집을 세우는 일과 같습니다. 그들을 세우는 것이 주님의 뜻이고, 우리는 그 주인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삶을 함부로 허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우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서로 판단치 말라
우리는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들로 인하여 언쟁을 하다가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깨어지는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모든 비본질적 주제에 대한 논쟁들에 대하여 "서로 판단치 말라"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이런 논쟁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문제로 어떤 형제를 근심케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형제를 사랑하고 세우는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들이 작게 생각하는 상대방을 비판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사업에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간에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업을 세워 나갈 수가 있을까요?
2. 서로 세워주라
하나님의 일을 세워가려면 우선 형제들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르고 견고하고 아름답게 세워지면 하나님의 일은 저절로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형제들을 세워나갈 수가 있을까요?
바울은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말 것을 주의하라’고 권면합니다.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간에 형제들이 나로 인해 넘어질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을 믿음이 강한 자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자유를 주신 것이지만 우리의 자유를 사용할 때에 내가 취하는 행동이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지, 아니면 형제들을 세우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21절).
중요한 것은 누가 옳은 것인가가 아니라, 형제를 세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때에는 언제나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행동이 형제를 거리끼게 만든다면 안 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작은 의미에서는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리낄 것을 두지 않음으로 형제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더 큰 의미에서는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3. 덕을 세우는 일
우리는 부단히 형제들과의 관계와 교제 속에서 화평을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덕(edification)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덕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은 ‘덕’(virtue)이라는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덕을 세움’(edification)이라는 동사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구체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상대방에게 불이익을 주고 어려움을 준다면 그것은 덕스러운 행동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부분 본질이 아니라 비본질적 껍데기를 가지고 열을 올리고 열을 받습니다. 우리들의 성장 배경, 인생경험, 정치적 소신에 따라 모든 생각과 판단이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르니까 자꾸 논쟁이 되고, 논쟁이 심해지면 싸우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의 가치와 생각들을 나눌 수도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상처를 주고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화를 피하지 않으면서도 상처 주고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가치
하나님나라의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절). 의와 평강과 희락! 우리의 이웃들이 어떻게 의롭게 살고, 평화롭게 살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느냐? 거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님이 의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며, 기쁨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왕궁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궁전의 꼭대기에 왕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으면 왕이 그 안에 계시다는 증거이며, 깃발이 없으면 왕이 그곳에 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내 주장과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우리의 삶의 어떻게 만들어져 가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흥분하고 감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지배하심으로 내 삶 속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루어져 가는 질적인 성숙을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 삶에 무엇이 죄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 대한 결정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23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가치를 좇아 행하지 않는 그 모든 일들은 다 죄일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의 자유, 믿음의 자유를 가진 우리 성도들이 스스로 그 믿음을 좇아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를 위하여, 주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소욕을 따라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일이라고 해도 그 모든 것이 죄라고 분명하게 못 박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정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 성경을 억지로 끌어대서 성경에서 죄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강변하든지, 어떤 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믿음을 좇아 한 행동인가?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 내 삶을 더 아름답게 가꾸는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결론은 스스로 내릴 수 있습니다.
5. 구원 받은 삶의 진짜 목적
망치를 들고 집을 짓는 지미 카터에게 "대통령을 지낸 분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 소감이 어떠한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대통령 후에 이런 일을 하라고 대통령을 시킨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인생의 가치는 대통령이 아닌 이웃사랑에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해비타트 운동의 창시자인 밀라드 풀러의 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 하나님을 만났고, 물질을 포기하고 가치를 발견했고, 특권을 포기하고 행복을 얻었으며, 자신을 버려 이웃을 찾았고, 쾌락을 잃어버리고 영향력을 남길 수 있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특권과 물질을 포기하고 이웃을 구원하고 세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삶! 그의 희생, 그의 피 흘리심, 그의 섬기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여러분과 저라면 이제는 우리가 이웃의 덕을 세워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정겨운 악수, 협력의 기도, 소리 없는 미소, 변함없는 관심과 지지, 무엇보다 함께 있어주는 것! 이런 작은 것들이 우리 이웃들의 삶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서로가 서로를 세워가는 인생을 삽시다!
08.31.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