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에게서 므낫세가 빚어진 이유에 관하여

열왕기하 20장 1-7절
정갑신 목사

예수향남교회

본문은 또 다른 위기를 넘어선 히스기야의 이야기다. 히스기야는 투항을 요청하는 앗수르 20만대군의 압박으로 나라가 소멸될 위기 앞에서도, 끝내 앗수르 대신 하나님께 투항하는 믿음으로 승리했다. 가혹한 기다림과 숨 막히는 인내를 통과한 믿음의 승리였다. 그런데 그 후 히스기야 치명적인 재앙이 찾아왔다.  

1절, 그리하여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2-3절,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며 통곡한다. 자신이 그동안 진실과 전심으로 행한 것을 아신다면 하나님은 현재의 고통에서 자기를 벗어나게 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벗어나게 하셔야 한다고 믿은 거다. 

물론, 히스기야가 자신의 의로움을 근거로 하나님과 거래하려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대체로 환난 중에는 자신의 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만일에 환난 중에 자신이 살아온 진실과 전심의 삶을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단히 뻔뻔한 사람이거나, 대단히 진실 되고 겸손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히스기야가 겸손을 가장해서 자신을 죄인이라 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의로움을 즐기는 얄팍한 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히스기야는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다. 하나님의 응답은 신속하게 임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돌아가는 이사야가 자기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임했다. 4절, 하나님의 응답은 히스기야의 생명 15년 연장이었다. 죽을 자가 15년을 더 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구체적인 치료행위를 하신다. 7절, 이사야의 손길이 닿는 순간 신적 손길이 그 몸을 통과하였고, 히스기야는 회복되었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언제까지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아는 인생을 우리는 시한부라 부르면서 그 단어를 한탄스런 방식으로 사용한다... “시한부래....”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살아갈 날들의 햇수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쳐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만일에 그것이 축복과 은혜가 되지 못한다면 그보다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내가 여전히 맑은 정신을 가지고 언제까지 이 땅에 존재할 것인지를 알 수 있다면, 나는 아름다운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보통 암보다 더 나쁜 게 심혈관 질환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지막 시간을 준비할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15년 간 자신과 나라를 위해 차분히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선물로 받은 셈이었다. 막연한 50년보다는 이렇게 구체적인 15년이 훨씬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히스기야의 질병 에피소드를 이렇게 정리하면서 위기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걸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면에서, ‘위기를 넘어서다’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마무리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닌 것 같다. 이 본문의 진짜 이야기는 따로 있어 보인다. 

위기를 넘어서던 히스기야가 넘어진다. 동일한 본문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본다. 1절 다시, 그토록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어찌 그리 야속하신가? 죽을병에 걸렸는데 걱정 말라든지 내가 함께 하겠다든지 하시는 대신,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곧 죽을 거니까 집안 정리하고 준비하라’는 식으로, 어찌 그리 냉담하게 말씀하시는가? 

왕위에 오른 지 14년 째 그의 나이 39세였다. 히스기야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성경은 히스기야가 다윗에 버금가는 하나님 중심 신앙으로 나라를 통치했다고 평가했다. 다윗은 서른 살에 왕위에 올라 40년을 다스렸다. 그런데 지금 히스기야는 25살에 왕 위에 올라 14년 만에 죽게 생겼다. 성경이 그것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의 사고방식에서 때 이른 죽음은 하나님의 벌로 여겨졌다. 따라서 히스기야 안에 어떤 해석되지 않은 모순이 발생한 거였다. 

자신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여왔다. 따라서 자신이 일찍 죽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벌 받는 것인데, 그것은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의 맘에 들도록 살아온 모든 세월과 어떻게 조화되는 것인가 하는 모순을 느끼면서 갈등한 것이다. 

히스기야가 섭섭했을까? 섭섭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상처받았을 것이다. 자기 안에서 해석되지 않는 모순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불면의 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것이 이런 기도로 나타났다. 2절, 우선 그가 벽을 보고 앉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앗수르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나라 전체가 빠져나갈 길 없는 고통의 늪에 빠진 상황이 되었을 때, 히스기야가 찾은 곳은 성전이었다. 이유는 아무리 두려워도, 아무리 조급해도, 현실이 아무리 처절해도 현재의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길만이 유일한 답임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집을 찾지 않는다. 몸을 돌려 벽을 보고 앉는다. 우리 문화와 히브리 문화가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벽보고 앉는 것은 전문용어로 ‘삐짐의 동작’이다. 삐짐, 마음 상함의 특징은 입이 다물어지고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히스기야는 기도하되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긴 이유를 여쭙지 않는다. 자신에게 어떤 숨겨진 문제가 있는지 가르쳐주시기를 여쭙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옳음을 강조함으로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부당함을 호소할 뿐이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자신이 이런 대접 받을 이유가 없음을 호소하는 동시에 심히 통곡한다. 

3절, 일단 심히 통곡한다는 것은 무언가 아직 확실한 답을 얻기 전의 상태에서 나오는 슬픔의 분출이다. 그러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아직 내 뜻이 하나님께 관철되지 않았기 때문에 분출하는 통곡이 있는 반면,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아직 온전히 일치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분출하는 통곡이 있다. 그런 면에서 벽을 바라보고 통곡하는 히스기야와 하늘을 바라보고 통곡하시는 겟세마네의 예수님이 대조된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통해 무엇을 원하시는 중인가요? 제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아 어떻게 맞추어야 할까요?” 

자신이 행한 바가 하나님께서 갚으셔야 할 빚이 되었다. 자신이 진실과 전심과 선함이 마땅히 이것과는 다른 대접을 받을 자격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거다. 전형적인 마음의 중심축의 이동, 자신이 중심이 된 안타까움, 신앙에서 종교로의 회귀현상이 비치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히스기야의 통곡은 일종의 저항이었고 부당한 현실에 대한 정당한 판결 요청이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현재 상황을 하나님의 주권의 관점에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라 공동체의 문제, 공공의 문제 앞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신뢰했던 히스기야가 지금 자기 개인의 생명의 문제 앞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본문이 우리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단지 기도응답에 관한 내용이었을까 하는 것은 의심스럽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을 요청하신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어떤 문제가 해석되지 않고, 그에 따라 제대로 넘어서지 못하고 어거지로 투쟁하는 이유는 ‘일생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세상의 라이프스타일’에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죽어도 괜찮은 삶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의 연약함을 넘어 진정한 책임자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를 살피는 게 중요하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기도다. 하지만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질문이 생략되어 있다. “하나님이 모르시지 않으실 텐데, 내가 굳이 상기시켜드릴 필요도 없이 하나님은 잘 아실 텐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나를 이런 상황 속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여쭙는 질문이 생략되어 있다. 이 질문이 생략되는 이유는 죽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 때문이다. 죽어도 상관없으면 되는데....

이제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이렇게 가장 중요한 중심을 잃지 않았다면 반드시 잊지 않았을 본질을 말씀하신다. 5절, 지금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응답하시려 하신다. 하나님 백성의 주권자는 하나님이 최종적인 주권자이심을 잊지 않는 주권자일 때 진정한 주권자가 될 수 있는 존재다. 

3절에서 히스기야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한 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를 위하여 응답하시는 거다. 다시 말하면 네가 이 문제를 너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네가 나를 진정한 주권자로 인정하는 이 백성의 주권자라면... 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시시라, 히스기야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시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한 왕 다윗의 하나님, 다윗을 왕으로 삼으신 진정한 왕 하나님이시다. 곧,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기를, 그리하여 자기 개인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유다민족 공동체를 향한 공공성 있는 기도를 요청하시고 공공성 있는 응답을 하려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6절, 하나님은 지금 히스기야의 생명을 살리려는 게 아니라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시려는 거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이유는 히스기야의 영광과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종 다윗을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히스기야 개인을 위한 응답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위한 응답’이라는 거다. 

히스기야에게 기분 나쁜 말씀인가? 아니다. 만일에 우리 중 누구든지 하나님의 응답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반갑게 그리고 영광스럽게 들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제대로 성장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나 개인을 위해서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응답하시는 거다. 하나님의 응답이 철저히 나 개인을 향한 응답인 것처럼 보이는 때조차 하나님은 반드시 공공적 차원을 위하여 공공성 있게 응답하시는 것이다. 나를 부르심은 나와 접촉하는 모든 이들을 함께 부르시는 것이다. 그래서 행16:33,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너의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부름을 받는 것이다. 사명!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눈물을 보셨고 그리하여 치료하시겠다 하신다. 단 몇 십분 사이로 히스기야는 죽다 살아났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 히스기야의 병이 죽을병이니 죽음을 준비하라 하신 것은 그의 내면이 앗수르에 대한 승리 이후 어느 새 개인적 자기중심성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죽음 앞에 직면하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자기 인생의 공공성을 생각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그 기대는 합당하고 참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기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보면 히스기야 안에서 이 거룩한 공공성은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응답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잠언에서 말씀에 대한 순종의 보상으로 부귀영화를 약속하신다. 하지만 부귀영화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나님도 그것들의 치명적인 위험성을 알고 계셨다. 

다만 그 보상의 약속을 통해서 우리들이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자발적으로 깊이 깨달아 그 위험의 길을 피해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기를 원하시기에, 우리가 좋아하는 그것들을 허락하시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히스기야의 문제는 승리의 개인화였던 것 같다. 앗수르에 대한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개인화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숲 속에 나무 한 그루 심어 놓고서도 ‘저 숲 다 내가 꾸민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얄궂은 자들이다.  승리의 개인화는 반드시 자기그림을 만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림처럼 보이는 자기 그림을 강조하고 추구하게 만든다. 그 그림이 자신과 나라를 망친다.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허무하게 죽은 것은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이 목 베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감옥에서 탈출해서 헤롯을 피해 다니면서 저항운동을 벌였다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감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빚어가는,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의미 있어 보이나 궁극적으로는 의미 없는, 하나님의 그림인 듯 하나 자기 그림일 뿐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치명적인 질병의 위기를 넘어서다가 개인적 자기중심성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서다 넘어진 인생이 되었다. 다음 구절들에 더 명백한 증거들이 등장한다. 히스기야에게 추가로 주어진 15년은 철저하게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공공적 시간이어야 했고, 그에 걸맞는 후계자를 준비하는 시간이어야 했지만 히스기야는 병에서 나은 후 너무나 안타깝게도 지극히 개인화된 자기욕망과 만족에 빠져 그 금쪽같은 15년을 망가뜨렸다. 

넘어짐의 조짐은 넘어짐보다 훨씬 전부터 내재하기 시작하는 거다. 히스기야는 다음 구절들에서 확실하게 넘어진다. 그러나 확실하게 넘어지는 것보다 넘어짐의 조짐이 더 중요하다. 넘어짐은 넘어짐의 조짐이 있을 때 자각하고 고칠 수 있어야만 한다. 그 때가 더 쉬워서가 아니라 그 때가 아니면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넘어짐의 조짐은 반드시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중심적 사고’, 곧 종교적 율법적 사고로의 전환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을 듣고 보고 싶은 것을 본다. 편집능력이 탁월하다. 내가 듣고자 하지 않는 것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 그랬느냐고 말한다. 내 주장과 느낌에 부합하고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 편집해서 자기중심적인 강력한 논리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 자기중심성을 예민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주님께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넘어짐의 조짐에서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나를 대신하여 예수가 사시는 삶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08.03.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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