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만남의 결과

누가복음 19장 1-10절
이병준 목사

(뉴저지 행복한교회)

정채봉씨가 쓴 에세이집에 '만남'이란 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작가는 여러 가지 만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가장 잘못된 만남이 생선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만남은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으로 꽃송이 같은 만남을 듭니다. 피어있을 때에는 환호하지만 시들게 되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라고 합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는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는 글자 그대로 에세이에 나오는 에세이 같은 이야기로 한번 귀담아볼만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만남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어떤 만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으나마나 여러분과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요, 가장 복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안 만난 인생을 살았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행복이냐 불행이냐가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삼중고(三重苦: 입과 눈과 귀의 장애)를 겪는 어린 헬렌 켈러는 스승인 설리반을 만남으로 성녀의 반열에 들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의 만남, 룻과 보아스의 만남, 수가성 우물가에서 불쌍한 여자와 예수님과의 만남, 나인성 과부와 예수님과의 만남,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과 하나님과의 만남 등등... 성경의 역사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역사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만남의 이야기 중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이 달라진 이야기, 어르신들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님을 만나서 팔자를 고친 삭개오의 이야기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리고를 지나가시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여리고는 여호수아 정복을 통해서 철저히 무너진 도시였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헤롯의 별장이 있을 정도로 발달된 큰 도시였습니다. 여리고는 요단 계곡에 위치해 있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요단 동쪽 지방으로 나가는 강의 건널목의 거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부유하고 또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도성을 “가장 신선한 영역”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이곳의 대추야자 열매와 발삼(balsam) 향나무에서 나는 향료를 세계의 시장에 내다팔아 부를 축적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가 겹쳐서 여리고는 팔레스틴 가운데 가장 큰 세관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0절에 보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에 동족들에게 세리와 죄인은 동급으로 천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세리들은 세금을 더 부과하여 탐욕으로 재산을 모았기 때문에 매국노로 불리우며 사람취급을 못 받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세리장이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삭개오는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권력을 이용해 얼마든지 갑질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동족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버림받은 고독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와 같은 죄인들도 영접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님이 여리고성에 오셨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 분을 꼭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분이 지나가시는 길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몰려들었는지 도저히 예수님께로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가 누가복음 18장 35절부터 43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오셨을 때 길 가에 앉아 구걸하던 앞못보는 걸인이 자기 앞으로 사람들이 웅성대며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무슨 일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알려줍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소경이 깔고 앉아 있던 거적때기를 집어 던지고는 벌떡 일어나서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릅니다.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앞서 가던 사람들이 “소경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공동번역, 떠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걸인 소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39절 “저가 더욱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결국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시고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공동번역,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소경을 향해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걸인 시각장애인의 눈이 떠지고 세상만물이 보이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43절)? 

바로 여리고성 들어오는 문 밖에서 늘 구걸하며 살던 시각장애인 바디매오가 눈을 뜬 것입니다. 눈을 뜬 과정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 돌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여리고 성안에 쫙 퍼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안에 들어오시기 전에 행하셨던 그 기적의 여세를 몰아 여리고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는 이런 소문에 대해 궁금증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3절에 보니까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떤 영어 성경은 “보고자 하되”라는 말 앞에 한 단어를 덧붙였습니다. 

“He wanted to see Jesus eagerly” 정말 예수님을 보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문을 따라 예수님이 오신다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리워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을 지나가시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삭개오를 보시고는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겠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놀라운 말씀입니까? 삭개오는 이 말씀을 듣자마자 얼른 나무에서 내려 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대며 못마땅해 하며 한 마디씩 합니다.“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그러나 삭개오는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대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것의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삭개오의 고백이 아닙니까? 나는 이 말씀을 “삭개오의 선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삭개오의 이런 감동적인 고백에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감동을 받으셨을 겁니다. 삭개오를 보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0-11절,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의 온 것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아멘!

지금까지의 본문 말씀에 이미 은혜를 받으신 줄 믿습니다만 몇 가지로 더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구원을 향한, 구원의 필요성을 느낀 삭개오의 적극성입니다.

 

삭개오는 비록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돈으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영혼의 만족을 얻지 못하고 항상 죄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물질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돈은 단지 우리의 생활을 좀 편리하게 해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에 목숨을 겁니다. 돈만 소유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될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의 주인공 역을 했던 미남중의 미남 배우라는 클라크 케이불이라는 배우를 여러분은 다 잘 알 것입니다. 그가 돈을 벌기 위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뛰는 것을 보고 한 신문기자가 “돈을 꽤 많이 모았을 텐데 왜 그렇게 겹치기 출연을 하며 몸을 망가뜨립니까?”하고 묻자 그는 임신하여 배가 불룩한 아내를 가리키며 “머지않아 우리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재산을 정리해보니 백만 달러가 넘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계산하면 천만 달러가 넘는 돈입니다. 그는 돈을 더 갖고 싶어 하는 욕심, 욕망 때문에 일찍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다 누린 사람입니다. 당시 솔로몬 왕처럼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앞두고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세상을 뒤돌아보면서 명언을 남겼습니다.“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 그러면서 솔로몬은 다음의 말씀으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4).

삭개오의 훌륭한 점은 물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물질이 결코 인생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 무엇이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돌무화과 나무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시111:10)라고 했습니다.

 

둘째, 철저히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마틴 루터는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진정한 회개”라고 말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설교할 때마다 울었습니다. 왜 설교할 때마다 우느냐고 물었더니 “회개하지 않으니 운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인 루이스 딜원(1632-1704)은 “개선이 없는 회개는 새는 구멍을 고치지 않고 계속 펌푸질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존 밀턴(영국시인. 1608-1674)은 “회개는 영원의 궁정을 여는 황금열쇠”라고 말했습니다. 영원의 궁정은 천국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는 천국을 여는 황금열쇠”란 말입니다.

본문에서 철저히 회개한 삭개오의 모습이 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것의 네 갑절을 갚아 주겠습니다.”

히브리어가 사용된 구약에서 회개의 의미는 ‘슬퍼한다’, ‘애통한다’는 뜻도 있지만 ‘돌이키다’, ‘돌아서다’의 뜻도 있습니다. 헬라어가 쓰인 신약에서는 ‘돌이킨다’, ‘마음을 새롭게 하다’.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다’, ‘목적이나 의도를 바꾸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행위의 의로움을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님께로 완전히 의존하고 돌아옴을 뜻합니다. 8절에 나와 있는 삭개오의 모습이 바로 회개한 자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썩은 생선을 가지고 일등요리를 하는 요리사는 없지만 그리스도는 썩은 생선과도 같은 타락한 인간을 회개시켜 최고의 인격자로 만드신다.” 바로 삭개오와 여러분과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셋째, 분명히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한글사전에서 헌신(獻身)을 찾아보니 그 뜻이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실 때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시험한 세 번째 말이 생각났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아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며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고 하지 않았느냐”하고 대답하니 사탄이 물러가고 천사들이 예수께 와서 시중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진정한 헌신은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오직 그 분만을 섬기는 일’이라는 것이며, 두 번째, 우리가 세상의 화려한 모습에 빠져 ‘하나님 섬기는 것을 등한히 할 때’에 사탄의 밥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힘을 다해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습니다. 어느 소경된 소녀가 손으로 바구니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리고 힘겹게 먹고 살면서 푼푼히 모은 돈으로 공책 30권을 사서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달라고 선교사에게 전했다는 흐뭇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시카고에 명문 기독교대학인 휘튼칼리지가 있습니다. 그 대학에는 브랭카드 홀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2층에는 그 학교가 배출한 선교사들의 명단과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몇 사람의 사진에는 십자가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순교한 선교사들의 표시입니다. 그 학교 출신으로 선교지에서 순교한 선교사 중에 제임스 윌리어트가 있습니다. 그는 남미 에콰도르의 이오카 인디언 부족에게 선교하다가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한 기독교 잡지사 기자가 엘리어트 선교사의 부인에게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때 부인은 “말씀을 삼가 주십시오. 비극이라니요? 제 남편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그곳에 갔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 위하여 그곳에 갔던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면서 남편이 휘튼 대학을 다닐 때 썼던 큐티노트 한 부분을 공개했습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그 무엇을 위하여, 결코 끝까지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젊음은 지나가는 것이다. 명성도, 자기만족과 쾌락도, 그리고 물질도 결국은 붙들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오, 하나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옵소서.”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께 모두 바치고 홀가분해지니 번민할 일이 전혀 없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마태복음 3장 8절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는데 회개에 합당한 열매중의 하나가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2장24절-25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어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3절의 말씀대로 여러분과 저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지만 이제는 삭개오처럼 예수님 만나고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쫒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엡4:22),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마3:8)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멘.

 

06.2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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