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골로새서 3장 12-14절 )
양수철 목사

(에버그린 선교교회)

먼저, ‘삶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오늘의 메뉴는 ‘삶을 맛있게 요리하는 방법’입니다. 먼저, ‘크고 깨끗한 마음이라는 냄비를 준비’한 후, 냄비를 ‘열정’이라는 불에 달굽니다. 충분히 달구어지면 ‘자신감’을 교만이라는 눈금이 안보일 만큼 붓습니다. 자신감이 잘 채워지고 나면 ‘성실함과 노력’이라는 양념을 충분히 넣어줍니다. 이때, ‘우정’이라는 양념을 어느 정도 넣어주면 훨씬 더 담백한 맛을 낼 수 있으니 꼭 잊지 말고 넣어주세요. 약간의 특별한 맛을 원할 경우, ‘이성(異性) 간의 사랑’을 넣어주면 좀 더 특별해집니다. 이 사랑이 너무 뜨거워지면 ‘집착’이라는 것이 생기는데, 생기지 않도록 불 조절을 잘 해야 합니다. 만약, 생길 경우는 ‘절제’라는 국자로 집착을 걷어내면 됩니다. 이때, 실패하면 ‘실연’이라는 맛이 나는데, 이 맛은 아주 써서 어쩌면 음식을 망칠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이 쓴맛을 없애고 싶을 경우, 약간의 ‘용서나 너그러움’,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넣어주면 어느 정도 없앨 수가 있습니다. 깊은 맛을 원할 경우는 약간의 ‘선행과 관용’을 넣어주면 됩니다. 가끔, ‘질투와 욕심’이라는 것이 생기는데, 계속 방치해두면 음식이 타게 되므로 그때그때 제거해야 합니다. 또한, 가끔 ‘권태’라는 나쁜 향이 생기는데, ‘도전과 의욕’이라는 향료를 넣어서 없애야 합니다. 이쯤에, 만약 삶이라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힘들어서 지치게 돼서 포기하고 싶어지면 ‘신앙’이라는 재료를 넣어주면 새로운 맛과 향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을 알게 되면 ‘기쁨’이라는 맛이 더해 가는데, 그 맛이 더해져 잘 어우러지면 진정한 ‘자유’라는 맛이 생기게 됩니다. 그 후에 ‘평안’과 ‘감사함’이라는 행복한 향이 더해짐으로 음식의 완성도도 높아집니다. 이 향은 아주 특별한 것이라서 이웃에게 베풀어 주고 싶게 되지요.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요리는 끝난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실’이라는 양념을 넣어 한소끔 끓인 후에 간을 봅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소스를 듬뿍 뿌려주면 이 모든 맛이 더욱 잘 어우러져서 정말 맛있고 깊은 맛이 나는 ‘삶’이라는 음식을 맛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설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는 좋은 재료들(66권의 성경 말씀들)을 가지고 맛있고 영양가 넘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인품들이 모여 멋있고 훌륭한 인생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비슷한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조화시켜 맛갈나는 아름다운 인생이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최종(最終)의 재료가 무엇인가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끝판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사랑을 가리켜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던 옷은 드럼통 같이 생긴 헐렁헐렁한 옷이었으므로, 편하긴 하지만 일할 때에는 매우 불편합니다. 그래서 일하러 나가려면 옷을 입은 후에는 반드시 허리띠를 매야만 했지요. 그러므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는 말씀은 ‘사랑으로 끝장을 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10절에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말장인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지금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로 사랑이 식었습니다. 노래나 드라마나 영화에서 항상 사랑타령을 하지만 사실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니지요. 참 사랑이 그리워서 몸부림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이 식어진 까닭은 불법이 성행하기 때문입니다.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이 진(秦)나라를 격파하고,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으로 입성하지요. 그런데, 궁궐은 호화스럽기가 그지없으며, 산처럼 금은보화들은 쌓여 있고,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왕상11:3)고 하신 솔로몬왕보다도 더 후궁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유방은 그 아방궁(阿房宮)에서 희희낙락(喜喜樂樂)하지 않고, 우리아 장군처럼 들판에 나가 야영을 합니다(삼하11:11). 그리고 진나라의 대표들을 불러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랫동안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시달렸습니다. 진나라의 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죽임을 당했고, 그것을 화제(話題)로 삼은 자도 시체가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각 고을의 대표들에게 약속하겠습니다. 법은 세 가지만 둘 뿐입니다.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자와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정도에 따라 처벌하겠습니다. 그 밖의 진나라 법들은 모두 폐기할 것입니다.”

여기 ‘법은 세 가지만 둘뿐입니다’라는 말에서 나온 사자성어(四字成語)가 바로 약법삼장(約法三章)입니다. 세 개만 두고 나머지 쓸데없는 법들은 모두 폐기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유방이 어떻게 그런 용단을 내릴 수가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유방은 백성들을 사랑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2016년 한국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년에 13,092명이었습니다. 하루 평균 36명, 40분마다 1명이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을 한 셈입니다. 그래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된 국가들 중에서 자살률 1위를 차지했고 지난 13년 동안 부동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대개는 사랑을 받지 못해서입니다.

의학계에는 ‘마라스머스’라는 이상한 병이 있습니다. 그 병의 증상은 신체발육이 부진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마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주로 전쟁고아나 고아원에서 외롭게 자란 아이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이 병은 병균이나 영양부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 때문에 일어납니다. 자살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첫 번째는, 상대방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여기서 용납이란 단어의 원어(헬라어)는 ‘아네코마이’인데 ‘지지하다, 받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원망을 들을 만한 사람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지지해주고 받아주는 관용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용납은 상대방을 계속 받아들이고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13절 중간 부분을 보면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용서하되’라는 원어는 ‘카리조마이’인데, ‘빚을 탕감하다’(to cancel a debt,  7:43)라는 뜻입니다. 죄란 일종의 빚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갚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용서란 그 빚을 갚지 않아도 되도록 아예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용서를 영어로 forgiveness라고 하는데 그것은 ‘잊어버림’이란 뜻입니다. 용서라는 pardon도 ‘덮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해야지!”하는 마음을 품어도 실천이 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뿌리를 없애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있으면 비가 올 때 독초는 다시 자랍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움의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화가 날 때 다시 분노의 싹이 틉니다. 분노의 싹이 틀 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려면 하나님께서 나의 많은 죄들을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하신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큰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주인으로부터 탕감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면 6,000☓10,000 즉,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가 하루 종일 일해서 받는 품삯이지요. 그러므로 6천만일(日) 즉, 23만년 동안 일해서 1불도 안 써야 모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100살을 산다고 해도 2,300번 다시 태어나서 일해야 다 갚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 말씀의 요점(要點)은 절대로 갚을 수 없는 금액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런 사랑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만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최종 목표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하셨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불법이 성행하는 삭막한 시대에 뜨거운 사랑의 화신이 되어 주님처럼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해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05.1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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