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하는 신앙인”

(로마서 7장 21-25절 )
강인국 목사

(미시아나한인교회)

비극적인 영웅인 세익스피어의 ‘햄릿’은 내면적으로 갈등하는 인간을 대변한다. 햄릿 왕자는 자신의 삼촌이 아버지를 독살하고 왕이 된 것을 알았다. 그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라며 번민한다. 

햄릿의 독백은 모든 사람의 고민을 대변한다. 사람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사는 날 동안 “이것을 할 것인가 저것을 할 것인가”라며 중얼거린다. 

그런데,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만 갈등을 하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불굴의 믿음을 가진 사람, 가장 예수님을 닮았다고 할 수 있는 사도 바울도 그런 고민을 했다. 15절에 보면,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 곧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한다. 18절에 보면,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함은 없다. 19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 21절에 보면,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구구절절이 한탄한다. 

그리고 바울의 입에서 참으로 비통한 장탄식과 한숨이 쏟아져 나온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이토록 고민하며 긴 탄식을 토하는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성도도 죄의 문제로 고민한다는 것이다. 

19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우리가 주님을 믿고 변화되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결심하는데, 실제의 삶에서 아직도 죄악의 문제로 고민하고, 심지어는 죄를 짓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하는 말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되었는데, 왜 죄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고민할까? 바울은 23절에서 자신의 마음에는 두 가지의 법이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변화된 성도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가지의 법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따라 살려는 선한 양심의 법과, 또 하나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살려는 악한 죄의 법이 있다는 것이다. 성도라고 할 찌라도 그 두 가지의 법이 마음속에 공존하면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싸우기 때문에 매우 괴롭다는 것이다. 

체로키 인디언의 우화 ‘두 늑대의 이야기’이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에는 흰 늑대와 검은 늑대 두 마리가 있단다.  흰 늑대는 착한 늑대로서 친절과 담대함과 사랑을 대표한단다.  그리고 검은 늑대는 욕심과 두려움과 증오심을 의미하는 나쁜 늑대란다. 그런데, 이 두 놈은 매일 치열하게 싸운단다.” 손자가 묻는다, “할부지, 그 두 마리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할아버지가 대답하기를, “네가 밥을 주는 그 놈이 이긴단다.”

이것은 성경과 매우 유사한 진리이다. 성도의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서로 싸운다. 내가 화와 미움을 품고, 죄악을 즐기면 검은 늑대에게 밥을 주는 것이 되고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기도와 말씀과 선함으로 주님을 따르면 흰 늑대에게 밥을 주는 것이 되고 죄로부터 승리하게 된다. 

변화된 성도의 마음에도 이 두 가지 죄의 법이 공존하면서 일생 동안 싸우고 있음을 말해 준다. 

 

2. 신앙인은 죄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분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고민과 한탄은 성도가 죄와의 싸움에서 진다는 어둔 그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고민은 신앙인이 죄악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거룩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가 죄를 이기기 위해서 갈등하는 것은, 성도가 죽기까지 치러야 할 전투요 숙제이다. 성도가 죽기를 각오하는 전투태세를 풀고 경계를 느슨하게 하고 안일하게 생각할 때 실패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노정 중에 죄악 불감증에 빠져 기어코 파멸의 길로 간 발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사건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하나님께서 천사와 나귀까지 동원해서 말하게 하셨을까? 이 사건이 비이성적으로 들리는가? 그런데, 현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온갖 일반적인 방법과 신비한 방법까지 동원하셔서 우리에게 경고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뉴스, 각종 사고, 부모의 훈계, 신실한 성도의 충고, 성경 말씀, 목사의 설교, 그리고 자연 재해와 양심의 소리 등을 통해 말씀하시지만, 사람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고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악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하고서 끊임없이 죄악 주위를 맴돌게 되면, 결국 탐욕과 죄악의 노예가 되고, 결국은 파멸의 길로 가게 된다. 

성도는 세속 세계 속에 섞여 살지만, 죄악에 섞여 살아서는 안 된다. 성도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베드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베드로는 일군들 사이에 앉아서 불을 쬐다가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했다. 그것도 세 번이나, 그때 어디선가 닭이 울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이 닭 우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닭 우는 작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였고 통곡하며 울었다. 

베드로는 투박한 뱃사람이고 일생을 거칠게 살아왔다. 예수님을 위해서 죽음도 각오하고 칼도 빼어 들었던 상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닭 우는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닭 우는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즉각적으로 회개하였던 것이다. 

성도는 죄악을 이기기 위해서 처절하게 살아야 하고 또한,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3. 신앙인은 작은 죄도 슬쩍 넘기지 못하는, 살아있는 신앙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실수나 결점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고 온갖 변명거리가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실수나 결점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고 어떤 사정도 용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바울은 다른 사람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지만,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작은 죄악의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괴로워했다.

시인 윤동주는 일제치하에서 밤하늘의 유성처럼 살다가 간 한국의 기독교 시인이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아마 한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 또는 평화상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는 ‘서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잎새에 부는 작은 바람”, 윤동주 시인은 스쳐 지나가는 작은 바람 한 줄기가 행여나 연약한 잎사귀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까, 행여나 작은 바람이 잎사귀를 떨어지게 하지는 않을까 라며 고민했다. 그의 마음은 사도 바울과 같은 맥락의 마음인 것이다. 

참으로 우리도 내 영혼에 부는 작은 바람의 움직임, 작은 새의 신음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앙인이 되기 원한다. 그리고 내 마음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하여서 즉각적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양심이 푸른빛으로 살아있는 성도가 되기 원한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고 싶다. 그렇게 죄악의 문제로 갈등하고 고민하던 바울이 25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갈등하며 한숨짓던 바울의 모습은 사라지고 감사가 넘친다. 지금까지 바울의 마음은 검은 구름 같은 어두움이었는데, 갑자기 햇볕이 쨍 하고 났다. 무슨 의미인가? 바울의 탄식은 믿음이 약해서나 자신이 죄악에 패배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알고 나니까, 비로소 자신이 너무나 비천하고 형편없는 존재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니까, 이제 자신이 그렇게 죄악 되고 비참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겨울에 태양 빛이 길게 안방까지 들어오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먼지 알갱이 하나 하나가 다 보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찬란한 하나님의 은혜의 빛 속에 들어가면 나의 죄는 더 크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로라”하는 고백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 우리는 자칫 잘못 율법의 빛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싶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빛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나 자신을 먼저 성찰해야 한다. 그럴 때, 내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이런 한탄이 흘러나온다, “오 하나님, 나는 곤고한 자입니다. 나 같은 것이 무슨 목사입니까? 나 같은 것이 무슨 신앙인입니까?”라며 가슴 치며 아파하게 된다. 

하나님의 수준을 알면 알수록, 나의 수준과 추함의 정도를 깨닫게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할수록, 내가 얼마나 죄악 되었는가를 알게 된다.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 빛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가 얼마나 못났는가를 깨닫는다. 무한하고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내 자신이 얼마나 유한하고 부족한지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 같이, 신앙인의 거룩한 고민을 짊어지고, 가을 하늘보다 푸른 양심으로서 매일 자신을 성찰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빛 속에서 감사의 삶을 살며, 이 세상은 더욱 밝은 빛으로 채워지기 원한다.

 

04.2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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