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바른 성례 집행

정 성 구 박사 | 한국칼빈주의연구원장, 총신대명예교수

하나님의 말씀 선포

카이퍼는 참된 교회의 특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카이퍼는 개혁 신학자 콤리(A.Comrie)의 말을 빌려 “참된 교회는 무엇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려진 계시의 진리를 고백하고 증거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일찍이 16세기 요한 칼빈의 입장과 일치한다. 칼빈도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또 들리며 성례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대로 집행되는 곳, 거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고 했다. 따라서 카이퍼는 주장하기를 교회는 진리를 찾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진리를 이해하고 명백히 선포해야 한다고 했다. 참된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인본주의적인 종교단체로서의 교회와는 확연히 구별해야 한다고 했다. 카이퍼는 현대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들은 사람들을 높이 올려 세우고 자기 자신들의 신(神)으로 만든다고 했다. 현대주의자들은 하나님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이 설명하려고 했다.

카이퍼는 이해하기를 교회는 관리만 잘하면 교회의 순결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교회의 영적 부패를 막으려면 교회의 행정 관리나 통치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이 순수한 신앙의 사람들을 협박한다고 교회다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카이퍼는 이런 현상들을 독일에 있는 루터교와 영국교회에서 찾았는데, 거기서는 행정관리가 교회 일을 주관했으며, 그들은 도리어 교회를 개혁하고 정화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카이퍼는 주장하기를 교회의 퇴폐는 모호한 교리에서 시작하여 교인들의 악한 행실로 발전되기 때문에 교회를 신앙고백적인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교회의 교의(敎義)에서 벗어난 직원을 묵인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성례를 더럽힐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찬탈하는 것이 되고 만다.

비록 카이퍼가 개혁교회의 교리를 철저히 고집했지만 그는 편협하고 근시안적인 교회관을 갖지는 않았다. 참된 교회는 파벌적이어서는 안 되고 같은 신앙고백을 한 다른 단체들의 진실한 믿음도 소중히 생각하고 인정했다. 카이퍼는 종종 자기 자신의 죄와 동료들과 성도들의 죄를 가슴 아파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와 부패가 교회를 병들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카이퍼는 때때로 그의 지지자들마저도 매우 당황하게 할 정도로 편지를 썼다. “당신은 모범적 교인이라고 할 권리나 자격이 없소이다. 당신은 당신의 부족 때문에 교회를 부패하게 만드는데 일조를 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시오”였다. 카이퍼는 언제나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수립하는데, 철저했다.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하시며 거룩하시기 때문이라 했다.

바른 성례 집행 (상)

정통적인 개혁신학을 따라서, 카이퍼는 성례가 적절하게 집례 되어야 한다고 했다. 16세기 개신교의 중요한 교회들은 모두가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聖禮)로 인정했다. 그러나 성례의 의미와 관련해서 이들 교회들 간에는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본래 성례(Sacrament)란 말은 라틴어의 Sacramentum에서 나왔으며 그 말의 본래 뜻은 어떤 것이 성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떼어 놓는다는 의미이다. 로마 군인이 입대를 하게 되면, 그는 황제와 그가 속한 군대의 상관에게 순종의 서약을 했다. Sacrament는 군복무를 위해서 떨어졌던 사람에게 받는 서약이며 약속이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말을 세례와 성찬식(Eucharist)으로 사용했고 Eucharist는 신비(Mystery)란 말의 헬라어 Mysterion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또 복음(The Gospel, Kerygma)을 전하는 것은 죄인들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전하는 기본적 방법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회개해서 그리스도께로 오는 자를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서약을 입으로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례란 죄사함의 복음을 외적인 표시를 통해서 가시적인 방법으로, 즉 세례식에는 물로, 성찬식에는 떡과 포도주로 선포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성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Visible Word)또는 ‘내적인 영적 은혜를 나타내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시’라고 했다.

어거스틴의 정의는 후일 마틴 루터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는 분리할 수 없다고 확언했다. 물론 요한 칼빈과 종교개혁자들도 같은 주장을 했다. 이는 중세 로마 가톨릭이 성례란 은혜를 주는 첫 번 방법으로 여긴 것과는 달리,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우선권을 주장했다. 칼빈 이후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성례에 한정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개혁주의자들은 성례가 기독교인들이 등한히 해도 그들의 영적 생활에 해를 주지 않는 상징으로 여기는 견해를 반대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문제에 대한 카이퍼의 입장을 간단히 살펴보자. 물론 카이퍼는 개혁교회의 사역자로서 성례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를 동의했다.

하지만 세례에 대해서는 한 가지 의견을 첨가했다. 이른바 벨직신경, 하이델벍 요리문답, 돌트신경을 믿는 다른 동료들과 논쟁이 붙었다. 카이퍼는 주장하기를 유아세례는 구약의 할례를 계승했기 때문에 유아 세례가 타당하다는 전통적인 신념을 강력히 지지했다. 즉 그는 히브리인들의 자녀들이 할례를 받을 때,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약의 공동체에 소속되어있다는 외적인 증표로 삼았던 것처럼,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자녀도 유아 세례를 받음으로 그들이 신약시대의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했다.

하이델벍 교리문답 69-74번에는 세례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거기서 ‘세례는 중생을 위한 씻음이며, 죄를 씻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세례 할 때 쓰이는 물이 무슨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준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님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의 보증물이며 속죄하는 독생자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주시는 표시’라고 된다. 그런데 카이퍼는 세례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증이라는 것과 세례시의 물이 죄인들을 중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그는 성도들의 자녀들 대부분이 그들이 유아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영적인 생명을 소유했다고 주장했다. 카이퍼는 중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방법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즉시 역사하시기 때문에 유아의 경우는 말씀이 없이도 은혜롭게 중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중생은 유아들이 행사할 수 없는 믿음을 심어주며 그 믿음은 그들의 생애 후반에 활발하게 활동할 것이라고 했다. 카이퍼는 이를 추정된 중생(Presumed Regeneration)을 주장함으로 논쟁을 일으켰다.

카이퍼는 1891년 미국의 장로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유아세례는 중생이 먼저 일어났다는 가정 하에 베풀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유아의 경우에는 중생이 일어났으며, 세례란 그것을 입증하는 약속의 표시라고 주장했다. 하나님만이 당신의 택자를 알고 계시니, 교회가 유아에게는 영적인 생명이 없다는 ‘독단적 선언’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카이퍼는 중생과 회심을 동일하게 생각지 않았다. 카이퍼는 실례로 구약에서도 할례 받은 사람들 가운데도 믿음이 없이 멸망한 사람들이 있듯이 지금 교회도 세례 받고도 구원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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