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성 구 박사 | 한국칼빈주의연구원장, 총신대명예교수
카이퍼는 칼빈주의적 신학자이고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조국 화란의 사회를 개혁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한결같은 주장은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당 울타리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카이퍼가 신학자, 목사에서 기독교 정치가로서 입문한 것 그 자체가 삶의 전부(The Totality of life)를 하나님께 드려야한다는 애타는 가슴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카이퍼 시대의 사회적 이슈
카이퍼 시대는 불란서 혁명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영향이 유럽 각 나라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또 18세기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산업혁명이 전 유럽을 들끓게 했다. 화란도 예외가 아니어서 나라 전체에 구조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화란에서 산업혁명에 적응하지 못하는 숙련되지 못한 노동자들이 늘어나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공장지역으로 몰려가게 되니 삶의 정황이 바뀌고, 위험한 노동조건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거기다가 노동시간은 업주들 마음대로 늘리고 임금은 형편없이 낮았다. 그런 와중에 공장지역에는 신흥부자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서 도시로 도시로, 공장으로 공장으로, 벌떼처럼 몰려다녔다. 노동자의 수입은 늘어가나 육체적인 피로가 누적되고,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미흡해서 여러 가지 인권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1880년대 화란은 경제적으로 심히 어려운 환경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또한 1870년부터 시작된 실업자 문제는 커다란 사회적 문제였는데 더군다나 보험이 되지 않아서 직업을 잃으면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현장에는 노동자들이 폭력사태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서 지방정부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환경 중에서 사회주의 정당, 노동당들은 노동자들을 부추기어 시위를 일으키도록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다. 불란서 혁명과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이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불법파업이 일상화 되었다. 또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억울한 일들을 해결해주는 듯이 보여지는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당 정치인들에게 기대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아브라함 카이퍼와 일생동안 정적이 되었던 하원의원 뜨룰스뜨라(P. J. Troelstra)가 있었다. 그는 이른바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진보파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1860년에 나서 1930까지 일하던 이른바 사회 민주당(Sociaal-Democratisch Partij)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흐로닝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류베르덴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사회민주당원이 되었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확산시키고 노동자 농민을 선동시키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의회 민주주의자요 철저한 칼빈주의적 신학과 신앙을 가진 카이퍼와는 정치적 노선이 처음부터 달랐다.
뜨룰스뜨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을 전파하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주의적인 진보파였다. 그래서 그는 불란서의 혁명주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사상을 결합해서 국가와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다. 카이퍼와 뜨룰스뜨라는 그의 생애가 끝나는 순간까지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현대자유주의 사상과 거대한 대결장에 섰다. 만에 하나 카이퍼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없었다면, 유럽 특히 화란 같은 나라는 사회주의국가로 전락할 뻔했다.
1870년대의 또 다른 문제는 사회 경제적인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정부를 아주 곤혹스럽게 할 뿐 아니라 입법부마저도 난처하게 만들었다. 산업혁명이 점점 확산되어가던 유럽에서는, 사회나 경제적인 문제가 희망과 꿈을 주기는커녕 눈물과 땀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당시는 자유방임시대였음으로 정부는 사회 경제 행위를 간섭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진리처럼 여겼다.
산업의 무한 경쟁이 거의 모든 나라에 일상이 되었다. 그런 중에 고용주들은 임금을 작게 주면서 노동시간을 늘리는 등 노동착취를 해도 국가가 통제 능력이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노동계약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도 없었다. 노동자들이 재해를 입거나 퇴직으로 어려움을 당해도 보험이나 근속수당을 주는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들은 손을 놓고 아무런 대안을 세울 수 없는 이른바 정치 부재의 시대였다. 자유주의자들이나 보수당은 이런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정치적 기득권 수호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런 난국에서는 카이퍼와 같이 바른 신학과 신앙을 가진 열린 정치 지도자가 필요했다. 카이퍼는 이런 사회적 문제점을 분명하게 간파하고, 사회적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갔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