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1월12일, 카이퍼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비문은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헴스켈크(Mr. Th. Heemskerk)가 썼는데, 그 비문에는 ‘말씀의 종, 교회의 개혁자’(Bedienaar des woords, Kerk Reformator)란 말이 유독 강조되었다. 카이퍼는 위대한 정치가로서 하원의원, 상원의원, 수상, 당 총재를 지냈고 대학의 설립자요 불굴의 저널리스트요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칼빈의 사상을 본받아 칼빈주의 세계관을 관철시킨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 목사요 설교자로서 화란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기를 바랬고 16세기의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서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당시 국가교회는 복음에서 한참 멀어졌고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카이퍼는 그의 혼신의 힘을 쏟아서 자유주의자들과 싸웠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서 한평생 투쟁했다. 말하자면 그의 생애는 교회의 개혁자로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카이퍼 생애는 어쩌면 그의 사상의 멘토인 칼빈과 비교할 수 있다.
16세기 요한 칼빈(John Calvin)은 종교개혁자 즉 교회의 개혁자이다. 칼빈이 교회개혁을 한 것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성경적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와는 너무나 이탈한, 말하자면 세상의 이방종교와 교황제도를 섞어서 이른바 유사종교가 되었기에 개혁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초하지 않고 인본주의적인 사상으로 교회의 전승(Tradition)을 귀히 여겼던 교회는 개혁되어야 했다.
본래 개혁(Reformation)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본래대로 돌아가는 것(Reformed According to the Word of God)을 의미한다. 결국 중세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너무나 멀어졌기에 본래 성경대로 다시 되돌려 놓는 것이 개혁이란 말이다. 그러면 칼빈이 1539년 추기경 사돌렛토에게 보내는 답신을 살펴보자.
“불신앙이 넓게 퍼져서 종교의 교훈이 대부분 혼합되어 순수하지 않으며, 의식은 오류투성인데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미신으로 말미암아 더러워지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하나님의 진리의 빛은 소멸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매장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덕은 아주 잊어진 체 버려졌으며 목사의 직무는 파괴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그와 같이 19세기 말,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도 당시 국가교회를 볼 때 교회개혁의 의지가 그의 가슴에 불꽃처럼 타오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16세기의 칼빈이 그러했던 것처럼 19세기의 카이퍼도 자유주의, 인본주의 사상으로 더럽혀진 교회를 향해 교회의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퍼에게 있어서 교회의 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었고 사명이며 소명이기도 했다.
화란 국가교회의 세속화
아브라함 카이퍼와 반혁명당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을 위한 사회개혁을 추진해가는 동안 화란국가교회의 영적상태는 형편이 없었다. 일찍이 영적 부흥운동 즉 레베이(Rev’eil)운동이 있기는 했으나 몇몇 소수에 불과했다. 화란국교 사람들은 역사적 개혁주의 교리에 둔감할 뿐 아니라 온통 세속주의에 물들어갔다. 이른바 흐로닝겐 신학의 도전으로 역사적 칼빈주의 신앙은 기를 펴지 못했고 자유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있었다. 화란국가 전체적으로 현대주의(Modernism)가 퍼져갔다. 흐로닝겐 대학의 학자들은 신인(神人)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냥 신적 성격을 가진 사람 정도로만 이해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성을 거부해버렸다. 그렇게 되니 화란국교회도 같은 신앙노선을 걷게 되었다. 자유주의 입장을 가진 지성인들이 각광을 받으면서 역사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공격했고 칼빈주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움츠려들고 자유주의자들에 힘에 눌리고 가려졌다. 바로 이런 환경에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현대주의 사상과 대결하는 전투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1865년에 화란국교회의 지도자들 중에 현대주의사상에 반기를 든 지도자들은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려고 ‘고백적 연합회’(Confessional Union)를 조직했다. 카이퍼가 우트레흐트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던 기간에(1867-1870) 그는 이 조직의 회장이 되었고, 암스텔담교회로 목회지를 옮긴 후에도 계속되어갔다. 말하자면 카이퍼는 자유주의를 대항해서 싸우며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키는 선봉장이 되었다.
카이퍼는 확신하기를 현대주의사상은 참된 기독교의 적수이며, 칼빈주의사상만이 자유주의를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사상체계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믿는 것은 바로 칼빈주의기 때문이었다. 한편 현대주의는 인간 스스로 최고의 결정권을 가지며,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판단했다. 말하자면 현대주의는 불란서혁명 사상에 기초한 반 기독교적 사상인데다 무신론적 세계관(Godless World-View)이다.
이런 현대주의 폐해는 엄청난데, 카이퍼는 이런 현대주의사상의 배후에는 독일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그리고 프레드릭 니체(Fredrich Nietzsche, 1844-1900)의 영향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들을 통해서 사회주의와 허무주의(Nihilism)사상이 일어났고 기독교의 도덕적 가치를 전면 부정하게 되었다. 더구나 다윈(C. Darwin)의 진화론 사상이 부흥되면서 현대주의사상과 연결되어 기존의 가치기준이 허물어지고 반 기독적인 자유주의로 전락했고, 교회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에 반해서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했던 칼빈주의 사상은 인간의 전적부패를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세웠다. 이런 사상은 삶의 전 영역에 구체화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이퍼가 자유주의자들과 대결을 하는 것은 그가 일찍이 베이스트(Beesd)교회에서 개혁주의신앙의 사람들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때문이다. 또한 칼빈의 사상에 심취되어 칼빈의 교회론을 연구했다. 그보다는 그 자신이 라이덴대학에서 현대주의,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자유주의자들과의 전투에서 맞수로서 전면에 나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카이퍼는 말하기를 “나는 한때 내 스스로 현대주의자였습니다. 나는 현대주의의 꿈을 꾸던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카이퍼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키고 현대주의 사상과 싸우기 위해서 최전방에 서게 되었다. 카이퍼가 우트레흐트교회에 재임하고 있을 때 그는 말하기를 “내가 원하는 교회는 개혁주의적이며 민주적이며 독립적입니다. 이는 교리로 잘 조직되고 공예배가 잘 이루어지고 교육이 잘 실시되며 사랑의 목회가 성공하는 그런 교회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카이퍼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신앙의 순결을 지키면서 성장해갈 것을 주문했다. 카이퍼는 또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대로 개혁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개혁되어가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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