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그딴 데’가 아닌 ‘이런 교회’를 보고 싶어라! (2)

은희곤 목사

평화드림포럼 대표

주님 평화! 얼마 전 두 아들을 둔 30대 후반 형제를 전도해서 집 근처 교회를 나가게 했습니다. 그때 그 형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그에게 말합니다. ‘왜 그딴 데를 나가느냐고.’ 교회가 오늘날 젊은 청년, 청장년들에게 한국 사회 안에서 ‘그딴 데’가 된 교회의 현실이 서글퍼집니다. 현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미래가 달린 일이기에 ‘치유와 회복’을 위한 기도와 시도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일이 다 밝히기 부끄럽지만 ‘그딴 데인 교회’는 상당 부분 기성교회와 성도들의 모습 속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더 근본적 원인은 교회를 성도를 그렇게 만들어간 오늘의 교역자들에게 철저한 책임이 있습니다. 정말 진정으로 가장 먼저 목회자들이 그리고 성도들과 교회가 회개하고 ‘다시 교회와 성도와 목회자’의 ‘본질적 모습’을 되찾아 가는 힘겨운 씨름 등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라고 밤낮 외쳐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맙니다. 그 메아리라도 듣고 자기만족에 도취한다면 그런 교회가 진정 ‘그리스도의 몸’일까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와 성도는 자기들끼리 빛의 자녀라고 바라보며 자가 만족하는 ‘교회 안에서의 빛’이 아닙니다. 예수는 세상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현존’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움직입니다. 교회는 항상 교회가 서 있는 자리에서 ‘예수의 삶’을 ‘재현’(Re-presentation)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예수가 하셨던 사역들을 ‘교회(=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가 오늘 서 있는 그 자리’에서(Here & Now) 다시 해야(Re-presentation)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교회 안의 벽’을 깨부수고 나와서 세상을 다니며 예수 사역을 재현하는 ‘작은 그리스도’요 ‘걸어다니는 교회’여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예수 생명인 복음’을 전하는 ‘세상의 빛’(마 5:14)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영혼이 떠나실 때(마 27:50) 나타난 현상이 무엇입니까?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거룩’은 ‘성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은 휘장이 찢겨 세상으로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성전에 ‘머무는 거룩’이 아니라 세상 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거룩’이어야 합니다.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을 통하여 ‘성과 속’의 구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속, 세상’안에서 ‘성, 예수살기’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영생에서 출발합니다(눅 10:25).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은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다만 그들을 보고도 누가 그냥 지나쳤는가, 누가 그들의 손을 붙잡아줬는가의 차이만 존재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붙잡아주는 삶이 ‘영생’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7) 영생의 길로 들어가는 즉 천국을 준비하는 삶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이웃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손을 붙들어주는 ‘책임적 나눔과 돌봄과 사랑’입니다.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정직한 교회, 세상이 다 맞다고 해도 말씀에 비추어 아닌 것은 아니라고 홀로일지라도 분명히 선포하는 공의로운 교회, 사회적 약자들에게 다가가 보살피고 헌신하는 교회, 교회 곡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섬김을 통하여 천국 곡간을 채우는 교회, 자비와 긍휼을 품고 위로하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실천하는 교회,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에 자연히 악의 기운을 물리치는 빛된 교회, 말씀으로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을 예견하며 교회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교회, 평화의 도구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교회, 도움을 필요로하는 이웃들을 외면치 않고 다가가는 교회,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불이익과 불편함에서 자유하는 교회 등등. 세상은 사람들은 ‘그딴 데’가 아닌 ‘이런 교회’를 보고 싶어합니다. 

‘그딴 성도’가 아니라 ‘이런 성도’를 세상은 보고 싶어합니다. 묵상 가운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나에게 전해지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만나보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pastor.eun@gmail.com

09.0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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