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싱톤중앙장로교회)
최근에 한국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드라마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있다. 자폐증을 가진 주인공이 사회생활에 최선을 다해 적응하는 스토리다. 장애를 가진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현실에서 분투하는 삶을 세심하게 잘 보여준다.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대해 한 가지 이상한 반응이 의외로 장애인을 위한 단체에서 나왔다.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에서는 이 드라마에 대항하여 장애인들이 받는 실제적인 아픔을 그리는 두 컷의 만평을 올렸다. 우영우란 스토리는 감동적이지만, 실제 장애인 삶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여전히 사회의 따가운 시선과 사회적 차별을 온몸으로 겪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사회는 장애인에 대해 많이 배려하는 나라다. 그러나 차별이라는 말은 한인 1세대라면 누구라도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오늘도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인데 2천 년 전에는 얼마나 더 심했겠는가? 심지어 신약성경으로 가장 처음 기록된 야고보서에도 차별에 대하여 먼저 문을 연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서 2:1). 왜 차별하지 말라 하는가? 야고보는 세상 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만큼 차별이 극심했다는 말이다. 로마 시대는 남성 우위 사상이 만연했던 사회였다. 초대교회 역사에 보면 로마 시대 하수구에 어린아이 시체가 가득한 것도 남아있다. 도움이 되지 않았던 여자아이를 버린 것이다. 심지어 유대인 사이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사두개파들은 주로 부유층이 많았다. 일반 유대인들을 차별하며 대했던 시대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차별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법과는 다른 법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 열두 해 혈루증 앓은 여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했던 세리장 삭게오, 사회에서 격리되어 외롭게 살았던 10명의 나병환자들, 그들 곁에서 친구가 되어준 분이 예수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불렀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 말씀한다. 기독교 복음이 로마를 변화시킨 것은 복음의 급진성이다. 사람의 외모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으로 사랑했던 사람들, 그 사랑이 로마를 변화시킨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한 말이 있다. “저들은 반드시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왜냐면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디오니시우스도 한 말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형제 중 대부분은 끝없는 사랑과 성실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다른 이들을 생각하였다. 큰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도맡아 온갖 필요를 돌보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섬기다가 때로는 저들과 함께 평온한 행복을 바라며 이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이웃의 병환을 짊어지고 기꺼이 그 고통을 끌어안다 자기들까지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형제가 그처럼 다른 이들을 간호하고 치료하다 환자들을 따라 죽거나 그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사람의 눈에는 참 어리석게 보인다. 전염병이 돌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격리시키는 일이다. 1세기 사람들이라고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오직 사랑이란 이름으로 죽어가는 형제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던졌다. 그 사랑으로 로마가 무너졌고, 기독교 복음이 온 세상에 펼쳐지게 되었다.
이전에 캐나다 토론토에 부흥회로 방문했을 때, 토론토 근교에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장애인 공동체를 찾아갈 기회가 있었다. 보기에도 좀 부담스러운 장애인 그리고 듣기 좀 힘들 정도로 괴성을 지르는 아이도 있었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헨리 나우엔이 마지막까지 섬겼던 곳이기 때문이다. 1971년부터 예일대학교 교수, 1981년부터 하버드대학교 교수직에 있다가 1986년에는 올라가는 삶을 다 내려놓고 이곳에 와서 마지막까지 삶을 보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의 삶 자체가 말해준다. 영혼을 향한 긍휼한 마음을 가졌을 때 장애인을 위해 섬기는 일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렸다.
우리 삶에도 연약한 지체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바로 하나님 앞에 그런 존재였으며 이런 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참 부담스러운 존재였던 나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가 나의 형상대로 만든 내 것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노라. 이 눈으로 사람들을 대하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크리스천은 삶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증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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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7.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