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메리교회 담임목사
지난 6월 말에 있었던 대법원의 낙태와 관련된 판결에 의해 낙태는 더 이상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헌법적 권리가 아닌 각 주 의회에서 가부(可否)의 여부를 의결해야 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이후 미국 여러 지역에서 낙태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거센 반대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에 아이를 출산한 한 산모가 자신의 아이를 향해 한 발언이 틱톡을 통해 알려지면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유아에게 젖을 먹이던 엄마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난 사실 너를 죽일 수도 있었어. 그러나 너를 살려주기로 결정했어!” (I could have killed you, but I chose to let you live.)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입니다. “나는 이 여자아이가 살 수 있도록 선택했습니다. 그게 나의 선택이었습니다. 모든 여성들은 그런 선택의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론을 재기합니다. 특별히 ‘죽일 수도 있었다’는 표현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을 향해 산모는 오히려 아이의 얼굴을 똑 치면서 한 번 더 “난 너를 생존하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너를 생존할 수 있도록 선택했단다.”라고 언급합니다. 그 말에 다 표현되지 않은 내용으로 ‘죽일 수도 있었는데 죽이지 않고 살리는 선택을 해 주었으니 ... 그러니 너는 평생동안 나를 고맙게 생각해야 되는거야!’ 라든지 아니면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한 생명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그런 선택의 기회를 가졌었다!’라는 나머지 말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에 왠지 모를 불편함이 쌓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21세기 삶의 한 모퉁이입니다. 생명에 대한 인간의 겁없는 이해관과 자세는 대단히 위험한 방향으로 인류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임산부가 태아의 생사(生死)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의 한 켠에는 ‘강한 자가 가지는 절대적인 권력’의 위험성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강한 자가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절대적인 힘과 권력’은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아슬아슬한 생(生)과 사(死)의 구석으로 몰고 있습니다. 상대보다 더 큰 경제력이나 혹은 권력으로 무장된 사람이 더 약하거나 아주 무력한 사람을 향해 ‘나는 당신을 살려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데…’라고 말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첫 출발점이 ‘태아의 생사권을 산모가 결정하도록 해야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게 들려지는, 그러나 시간의 진행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파괴와 죽음을 가져오는 그 논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절대적 우위의 힘을 가진 임산부가 아무런 방어력도 갖추지 못한 그래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의지하고 있는 자기 배 속 ‘태아의 생과 사를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는 그 동네의 논리가 오늘 우리가 걷고 있는 2022년 지구촌의 한 모퉁이에서는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전쟁이라는 모습으로 모형만 바꾸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아담의 잘못된 선택이 인류에게 고통스런 죄의 짐을 남겼듯이 오늘 그 죄짐을 지고 있는 인류에게 또 다른 선택, pro-choice가 무거운 짐덩이를 하나 더 지우고 있음을 봅니다.
이 어두운 시대 한 가운데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는 첫 인류 아담의 선택이 빚은 고통스런 현실 앞에 창조주가 선택하신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피로 얼룩진 진한 초청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가 세상에 더 분명하게 더 넓게 들려지기를 소망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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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3.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