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런 교회’를 보고 싶어라! (1)

은희곤 목사

평화드림포럼 대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부와 권력과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가야 한다는 의미로, 사회 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단어입니다. 반대로 사회 지도층들이 이를 실천하지 않았을 때 비판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유래는 이렇습니다. 백년전쟁(1337~1453) 당시 영국군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한 프랑스의 도시 '칼레'는 거센 공격을 막아내고자 치열하게 싸웠지만 결국 항복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곧이어 영국왕 ‘에드워드 3세’ 앞에 자비를 구하는 칼레시의 항복 사절단이 도착합니다. ‘에드워드 3세’는 항복을 수용하는 한 가지 조건을 말합니다. "좋다. 모든 칼레 시민들의 생명을 보장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해 처형당할 대표자 6명을 선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칼레의 시민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던 그 순간, 한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칼레시의 가장 부유했던 '유스타슈 생 피에르' 였습니다. 그의 희생정신에 감격한 고위 관료와 부유층 인사들이 함께 했는데 모두 7명이었습니다. 피에르는 이튿날 가장 나중에 오는 1명이 남고 나머지 6명이 영국군 진영으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날이 밝은 이튿날, 오직 피에르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의아하게 여긴 6명이 피에르의 집을 찾아갔지만, 그는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였습니다. 7명 모두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꿈틀거릴 그 1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한 그리고 누가 살 것인가를 놓고 설전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리라 생각한 피에르가 스스로 먼저 그 1명이 되어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이에 남은 6명은 담담하게 영국 왕 앞으로 나갔고 교수대로 향했습니다. 그 순간 영국의 왕비 ‘필라파 드 에노’가 처형을 만류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왕비는 왕에게,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어 자신의 뱃속 아기를 축복해 달라고 왕에게 간청해 결국 그들은 모두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00여년 후 칼레시는 용감했던 시민 7명의 모습을 ‘오귀스트 로댕’에게 청동상을 의뢰해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 7명처럼 사회 고위층이 져야 할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퍼온 글) 세상은 성도들과 교회에게도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합니다. 세상은 ‘세상의 빛인 교회와 성도’를 보고 싶어합니다. 세상은 ‘우리와 교회를 통해’ 예수를 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교회의 빛이 되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세상의 빛이 되거라’(마 5:14)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어느덧 ‘교회의 빛인 어항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성도들을 그 안에 가둬두고 싶어하고, 세상으로 파송을 싫어하고, 말과는 달리 크리스천의 삶에 대해 그리 그닥 관심 갖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신앙따로 삶따로 ”따로 교인“들이 상당수가 됩니다. 성도들이 오직 교회에서 참 좋은 크리스천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선교회에서, 여선교회에서, 성가대에서, 찬양팀에서, 봉사부에서 등등 정말 교회를 잘 섬기는 일에 관심을 갖고 헌신하도록 훈련시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가령 예배를 돕는 아름다운 음성의 솔리스트가 주일은 물론이고 주간에도 거의 매일을 새벽 오전 오후 저녁등 모든 교회집회와 심방과 봉사에 참여한다면 보편적으로 참 훌륭한 성도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과연 집에서 사랑스러운 아내, 좋은 엄마를 기다리는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정말 그럴까요? 오히려 교회를 섬기는 일과 크리스천으로서 집에서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아들 며느리, 좋은 딸 사위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교회는 세상에 나가서도 크리스천 아빠 엄마, 크리스천 직장인과 상사, 크리스천 공동체 구성원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훈련시키는 ‘교회의 본질적 구조’를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의 구조는 ‘모이고 흩어지는 것’ (together and disperse, ecclesia et diaspola)입니다. ‘모여서’(together, ecclesia)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kerigma), 배운 말씀을 더 공부하고(didache), 세상에 나가서 왕따를 당해도 흔들리지 않도록 외롭지 않게 함께 모여 서로가 힘이 되는 성도의 교제 나누는 친교(koinonia), 

그리고 이젠 ‘흩어져서’(disperse, diaspola) 가정에서 직장에서 마을에서 공동체에서 사회에서 ‘모여서 듣고 배우고 교제’한 힘으로 삶에서 말씀의 적용을 찾아 나가 세상을 치유하는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것(diakonia), ‘세상의 빛이 되며 사는 것’, 그래서 세상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걸어다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 안에서 ‘작은 예수’(small christ)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통해 예수를 봅니다. 말로, 전도지로, 동영상으로, 미디어로, SNS로 예수를 전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는 ‘삶으로 예수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젠 정말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젠 ‘교회의 빛인 어항교회’에서 스탑하고 돌이켜 ‘세상의 빛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주변에서 자비와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 억압받고 힘들고 아파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성도와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 찾아가 어둠을 물리치고 ‘예수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찾아가 위로하고 평강을 전하며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사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통해 ‘예수는 복음은’ 전해집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성도들을 교회 안에 가둬만 둬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도록 교회에서 훈련해 세상으로 파송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이므로 마땅히 교회도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의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발버둥 쳐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이런 교회’를 세상은 보고 싶어 합니다. ‘이런 성도’를 세상은 보고 싶어 합니다. 교회는 ‘모이기 위해 모이는 곳’이 아니라 교회는 ‘흩어지기 위해 모이는 곳’입니다. 세상은 이런 교회, 이런 성도들을 보고 싶어라!

pastor.eun@gmail.com

08.0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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