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더믹 시대, 찬송의 문을 열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동진 목사

(성화장로교회)

홍난파는 “교향악단이 없는 경성(京城)은 문화시민의 수치이다.”라고 말했다. 1939년 3월 26일, 한반도 땅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교향악단의 첫 공연이 열린 후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당시 한반도에는 경성제대와 연희전문 학생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관현악단과 실내악단 정도가 있었지만 정규 편성의 교향악단은 없었기에 당시 지식인들은 솔로 연주자들뿐 아니라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오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에 접어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전시동원체제라는 이유로 관심을 갖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첫 교향악단은 해방이 된 후 현제명 등을 중심으로 한 고려교향악단이 출범해 1945년 10월 첫 연주회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교회는 한국음악인들의 산실(産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음악인들이 교회에서 음악을 접하고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타종교와 달리 기독교의 강점은 찬양이었다. 서양음악만이 아니라, 국악도 교회가 대중화되는 통로 역할을 상당 부분 감당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음악인 중에도 존경받는 신앙인들이 적지 않고, 각 교회의 지휘자, 반주자, 솔리스트, 악기 연주자들 또한 여러 모양으로 음악문화의 활성화에 큰 몫을 감당하고 있다.

홍난파가 크리스찬이었다면, 아마 이렇게도 말했을 것이다. “음악이 없는 교회는 기독교 문화의 수치이다.”라고. 또한 최근 돌아가실 때까지도 성경 이야기를 소재로 오페라를 쓰고 있던 박재훈 박사도 “교회에 음악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수치스러웠을 것이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된 교향악단을 그리던 홍난파는 1911년에 새문안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울밑에선 봉선화’의 원곡인 <예수>라는 찬양을 작곡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또한 미국 유학시 흥사단에 가입(가입번호 266)했지만, 유학 생활의 빈곤과 교통사고로 특별한 활동은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신앙과 애국정신 함양의 기회를 놓친 아쉬움이 있다.

팬더믹 기간을 지나면서 마스크는 아직도 찬송을 부자유스럽게 막고 있다. 예배에서 성가대(찬양대)원들의 입을 마스크가 가로막고 있고, 회중찬양은 목사나 찬양인도자 혼자 부르고 있는 가운데 회중들은 PPT 화면을 보며 눈으로만 따라 하는 모습이 이젠 익숙해진 환경이 되었다.

차세대 신앙교육을 말하고, 한인교회의 어려움과 미래를 걱정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진단과 방향과 대책을 구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 아니 시급하다. 오늘 시론에서 음악을 언급하는 이유는, 교회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말씀만큼 중요하고, 다른 신앙활동들의 활동력을 일깨우는 요소인 동시에 동력(原動力)이 되기 때문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는 말씀은 오늘 다시 기억되어야 할 메시지이다. 엔더믹으로 전환되어가는 즈음,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그러하고, 찬송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도 다양한 형태의 찬송의 문이 활짝 열려야 한다. 미 대통령 의료고문인 앤서니 파우치 박사는 “미국이 팬더믹 전염병에서 벗어나 독감과도 같은 앤더믹 풍토병으로 전환하는 중" 이라고 말했다. 이제, 회중들의 마음에 생동력이 생기고, 입술의 열매인 찬송이 교회를 들뜨게 해야 할 때가 되었다.

 

djlee7777@gmail.com

06.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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