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엽 목사 (오렌지 카운티 나침반교회)
지난 번 추석 때 이런 카톡을 받았다. 어떤 노처녀가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부모를 찾아 고향으로 갔더니 아버지가 대뜸 하는 말이 “넌 왜 결혼도 못하냐?”였다. 그러자 딸이 하는 말, “대통령도 못하는 결혼을 내가 어떻게 해요?” 다시 아버지가 “그럼 넌 대통령이라도 되어야 했지 않냐?” 또 다시 딸이 하는 대꾸, “아버지가 대통령이 아니었는데 내가 어떻게 대통령이 되겠어요?” 하도 그럴듯한 내용이어서 한참을 웃었다. 그런데 실제로 지난 번 추석 때 한국에서는 아들에게 “넌 왜 취직도 못하냐?”라고 물었다가 칼부림을 당한 아버지도 있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명절에 고향을 내려가기 가장 싫은 이유는 친척 어른들로부터 결혼과 취직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노처녀에게 결혼이야기를 물은 것이나 아들에게 취직이야기를 물은 것, 그리고 시골의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그런 질문들을 하는 것이 좋은 동기였겠는가, 아니면 나쁜 동기였겠는가? 당연히 좋은 동기다. 좋은 동기로 물은 것이었다면 무엇이 잘못되어서 이렇게 칼부림까지 나는가? 아마도 여러 가지 진단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시작을 한 데서 원인을 찾는다면 동기는 좋았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개 좋은 동기로 하는 말 때문에 시비가 붙고 싸움이 벌어지고 그래서 갈라진다. 사소한 문제에서 시비가 붙는다. 진짜 중요한 문제 때문에 생기는 시비는 극히 예외적이다. 성경에 나오는 빌립보교회도 사소한 문제로 시끄러운 교회였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빌2:1)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믿음이 약하거나 시험에 빠진 사람을 권면하고 격려하려는 자들, 혹은 영육간의 고통에 빠진 자를 위로하려는 자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다른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자들, 무엇보다 긍휼과 자비로 곤경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이 모든 일들의 동기는 대단히 훌륭한 것들이었다. 바울은 이어지는 글에서 좋은 동기로 시작하려는 일에는 한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조건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뜻에서 시도하는 것이라 해도, 바로 그런 나름의 노력 때문에 싸움이 나고 문제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리차드 마우가 “무례한 기독교”에서 우려하였듯이 문제를 조정하려는 많은 신자들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건이란 다름 아닌 겸손이다. 겸손이란 상대방보다 자기를 낮추는 자세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이란 이해(Understanding)와 맞물려 있다. 상대방의 눈높이에 서거나 그보다 더 아래에 서서 처지와 형편을 이해해 주는 것이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겸손의 모델로 예수님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우셔서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공동체를 살리셨다. 이것이 바울의 논지다.
가정이든지 교회든지 어떤 공동체든지 좋은 분위기가 유지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겸손이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으뜸가는 덕목에 대해 그의 서간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하나님께 신실한 경건을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진리, 즉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는 진리 이외의 다른 것에 머물지 마십시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그리고 셋째도 겸손입니다.” 어거스틴은 겸손이란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하는 진리라고 하였다. 우선은 높은 자부터 겸손해야 한다. 가정에서는 가장이 겸손해야 평화가 흐른다. 교회에서는 목사가 겸손해야 교회에 훈훈한 분위기가 생긴다. 젊은 날의 목회를 돌아볼 때마다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 자신이 좀 더 겸손하게 처신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동기는 좋았다. 그러나 그 교인의 눈높이에 맞추거나 아래에 서서 문제를 보았다면 좋았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한 말부터 겸손해야 한다. 대개 말을 경솔히 하거나 직선적으로 하거나 교만한 태도로 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다. 자기의 감정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것은 훈련이 필요하다. 겸손을 생활화하기 위해선 남의 말을 끊지 말고 경청하는 태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남이 말할 때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라도 꾹 참고 끼어들지 말고 다 들어주는 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겸손하게 듣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듣는 귀와 깊은 배려 속에서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말하는 학자의 혀가 절실히 필요하다(사50:4). ‘그럴 수도 있지’라는 너그러운 태도 역시 중요하다. 나에게는 엄격하게, 그리고 남에게는 관대하게 대하려는 자세가 겸손한 태도이다. 그러나 대개는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태도를 가지기 때문에 싸움이 생긴다. 우리 모두가 겸손의 자리에 있어야 공동체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