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녕 사모 (뉴저지복음장로교회)
하갈은 어떤 사연으로 여종으로 끌려오게 되었던지, 사라의 애굽출신 여종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사이에 낳은 언약의 아이를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오게 할 계획이 확고하셨습니다. 약속의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오는 과정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약속을 100%로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심을 아브라함, 사라 부부에게 신뢰라는 테스트를 아주 힘겹게 진행시키시는 중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몸에게서 난 자라는 것만 생각하다 생각해낸 것이 첩입니다. 사라는 올라오는 모든 괴로운 심정을 누르며 집안을 위해 남편에게 아이를 낳게 해주려 첩을 제 손으로 두는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쓰린 마음이 상상이 갑니다. 그녀를 자기 대신 씨받이 첩으로 남편에게 내어줄 정도이었으니 결코 사라와 하갈이 나쁜 관계였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의 첩이 되어 아이를 갖게 되니 하갈은 태도가 돌변해 여주인 사라를 깔봅니다. 아무리 아이가 없다 해도 사라와 아브라함의 사랑전선은 막강한데 잘못 집었다가 큰 코를 다친 여인입니다.
사라가 하갈을 신뢰하고 남편에게 첩 자리를 내어준 덕에 아이를 잉태했을 때 “종의 신분으로 아이를 가졌으니 제 아이는 여주인님의 아이입니다” 하고 겸비하게 여주인에게 순응했다면 더욱 사라의 신임을 얻고 사라와 자매같이 지낼 수도 있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나 종으로 안방마님을 밀어내려고 사라의 자리를 넘나보는 그 어미의 교만이 아들에게도 꼭 같이 넘쳐 이삭이 젖 뗌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스마엘이 눌 자리인지 아닌지 분간을 못하고 이삭을 비웃다가 결국 집을 쫓겨나고야마는 비극을 맞습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 아니던가요? 교만해진 하갈은 자신이 얻고자 하던 욕망이 좌절되니 돌이켜 회개할 생각 없고, 다만 나나 너나 똑같이 우리 주인님 아브라함의 아내이기는 일반이라는 평등론에 입각해 분하고 억울하게 독을 품으니 결과는 너무도 엄청납니다. 어미의 교만한 태도에서 보고배운 대로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다 아예 쫓겨나게 되는 고통을 불러오게 됩니다. 하나 여종의 아들일지라도 아브라함의 씨이기에 한 민족을 이뤄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비록 서자라도 자식이라 맘이 아프긴 해도 냉정히 내쳐 집안싸움을 정리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들 낳음을 미끼로 주인의 자리를 넘보던 탐욕과 교만의 결과는 자신과 아들을 고생길로 몰아세웁니다. 자신의 잘못은 묻어두고 받은 피해의식 속에서 상처만을 붙들고 방성대곡하여도 아브라함의 연고로 하갈을 찾아와 “두려워 말라”고 다독거리시며 ‘아이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며 물가로 인도해주시고 살 길을 터주시는 나의 하나님을 만나는 하갈입니다. 그 후로 계속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하시어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용사가 되고 모국 애굽 여인으로 짝을 지워주어 가정을 이루고 12방백이나 이루어 하윌라에서 앗스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하나 하갈의 안방마님자리를 넘보던 싸움이 방대해진 이스마엘의 자손과 이삭의 자손간의 자리싸움으로 연결되어 아랍족속들과 이스라엘의 땅 전쟁은 여전합니다.
누구든 자신의 문제만 커 보여 권모술수로 남을 악하게 이용하는 그런 모습만 하나님이 보신다면 구원받을만한 인간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스로가 부른 고통일지라도 아픔가운데 부르짖고 주님의 음성을 복으로 받는 자는 어느 누구나 그 인생을 책임지시고 채워주시며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으며 건져주니 보따리 챙기는 하갈에게 내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보며 우리 주님의 그저 품어주시는 넘치는 사랑의 은혜의 강가로 염치없이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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