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녕 사모 (뉴저지복음장로교회)
사라는 신혼 때에는 예쁜 얼굴로 아브라함의 마음을 빼앗은 그야말로 ‘공주과’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습은 자손을 잇지 못하면 칠거지악으로 여기던 한국의 풍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혼인한지 오랜데 아이가 도무지 들어서지 않으니 사라에겐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뜬금없이 잘 살던 곳을 정처없이 자손의 번창을 약속하는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황당한 남편을 말리지 못하고 따라나섭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약점에 붙잡혀 마마님으로 한 성질부리며 유세할 사라는 남편이 뭐라하든 그저 순복합니다. 심지어 남편이 누이라고 자신을 방패막이로 비겁하게 생명을 건지려고 해도 조용히 도무지 말도 안되는 남편의 요구에 응해주는 사라입니다.
남편의 말도 되지 않는 처사에도 순복하는 사라를 하나님은 시원하게 편들어 주셔서 바로에게서 그를 보호해주시고 물질까지 주시고 높여주십니다. 인간 남편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믿어지지 않는 행동을 할 수도 있는 나약함을 보입니다. 허나 남편이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게 기막힌 순간에 절묘하게 구해주시고 돌보심을 지나며 이제 남편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고 차츰 자신의 믿음으로 붙잡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직계자손을 통해 구세주 예수님이 오실 약속은 물론,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리 믿음이 연약해서 넘어져도 만나는 문제를 통해 드러나는 나약함을 통해 일으켜 감동케 하심으로 관계를 깊이 맺어 가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막힌 예술입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 길에 붙은 군식구가 너무도 많아 자기 것 챙기는데 잽싼 조카 롯 가족들을 거느리며 속 끓일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마는 친 자식처럼 돌보는 아브라함인데 아내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면 그리하기가 쉬웠을까요? 조카 롯을 위해선 생명도 아끼지 않고 저를 용감히 구해오면서도 자기 목숨위해선 두 번이나 자기를 방패막이로 하는 남편입니다. 조카만큼도 사랑을 못 받는다 속이 쓰렸을 만도 하건만…. 남편이 두 번씩 자신을 앞세워 남의 남자에게로 보내도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이번에도 보호해주실 것을 믿으며 남편이 이로 인해 내가 아이를 못 낳아도 나를 당연히 사랑하지 않을까 자위하며 오히려 마음이 당당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빼어난 미모로 얼마든지 교만할 공주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치명적인 아픔을 통해 하나님은 사래의 이름을 바꿔주신 대로 열국의 어미인 사라로 그릇을 키워 내십니다.
많은 이들이 “나를 나중에 하나님이 크게 쓰실까요?”라고 자신이 어찌될지 묻곤 합니다. 누가 하나님이 크게 쓰실 자일까요? 구원은 예수님의 공로로 값없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누구나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말씀 그대로 성결하게 산 제물로 자신을 드려 하나님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 즉 믿음으로 연단된 사랑 충만 성령 충만한 청결한 그릇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말씀을 소중히 믿음으로 화합하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말씀에 약속을 하신대로 이루어 귀히 써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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