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아픔을 통해 열국의 어미답게 성숙해진 사라

이희녕 사모 (뉴저지복음장로교회)

사라는 다만 후손을 이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록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자가 약속을 이을 자인 것에 대해 제 멋대로 해석하여 조급하게 첩으로 남편에게 하갈을 줍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브라함이 이를 거절치 않고 사라의 제안에 따랐는지? 하기야 본인도 조급해 자기 집에서 키우는 엘리에셀을 후사로 함은 어떨지?라고 묻고 안달이니 그 제안이 첩이라도 제 몸에서 낳은 것이니 그럴듯하여 앞으로 닥칠 집안의 불화는 염두에 두지 않고 ‘거 좋은 생각’이라 맞장구쳤나봅니다.

어느 여자가 자기 남편을-아무리 종의 아이는 자기 아이나 다름없다하여도-다른 여자에게 줄까요? 그만큼 자손을 이어야 한다는 과중한 책임감이 아마도 제 생각엔 여자의 자존심을 접고 아브라함의 몸에서 낳은 자가 후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름대로 내린 믿음의 결단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낳게 되어 어미 하갈이 종의 신분을 잊고 아이 난 위세로 여주인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그러나 정작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을 줄이야…. 25년 만에 약속대로 이삭이 생겼을 때 처음엔 도무지 황당한 꿈같던 약속이 현실이 되니 본색이 나옵니다. 이제는 세상의 부러운 것도 없고 이 설욕을 끝까지 참을 이유가 없어진 사라가 당당한 주인 마나님의 자리에 앉습니다.

아이 없는 집에 비록 정실 아들은 아니라도 14년을 혼자 집안의 초점을 독차지하다가 뭐가 하나 쏙 나와 자기를 밀어내니 이스마엘이 재미있을 리가 만무입니다. 주제 파악을 못한 하갈과 이스마엘이 결국은 이삭을 희롱하는 장면에서 사라가 이대로 두어선 안 되겠다 선을 긋는 바람에 아비 아브라함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저도 한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결국 저들을 내칩니다. 어린 아들 이삭에 대한 보호 본능이기도 했으나 문제가 일어나니 역시 하갈은 종이니 마음대로 내어쫒아 버리고 자기 것을 지켜내는 차가움이 진짜 어미 된 보호본능이겠지요. 이로 인해 아브라함에게 혼란을 주고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되며, 후일에 후손들에게 고통을 주는 빌미가 되지만 그때의 문화적 습관으로 후손을 이으려는 안간 힘을 쓴 무자한 여인의 절박한 심정도, 맹렬히 지켜내는 무지한 모성애도, 이해는 갑니다.

애지중지한 이삭을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치러 떠났을 때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언지를 주었을지? 비장한 각오로 조용히 떠났을지? 사라에 대한 것은 한 마디도 언급은 없으나 엄마가 기절할까? 제물 드리는 일은 남자들일이니 아들과 사환을 데리고 아침 일찍 길 떠났으니.... 아브라함이 말없이 그냥 갔을까? 벌써 커서 하나님께 제물 드리는 일에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간다하여 내심 대견했을까?

이삭을 낳고 37년이나 더 살며 좋은 아내, 열국의 어미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나름대로 굳건히 지킨 믿음의 여인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사라를 통해 모든 허물도 나무라지 않고 긴 인내로 깎으시며 열국의 어미로 사라를 출세시켜주시고, 누리게 하시고 후대의 믿음의 본이 되게 하신 주님의 솜씨를 찬양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6). 기쁨의 단을 거둘 내일을 바라보며 사라의 길을 기쁘게 따라가리라 조용히 결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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