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이희녕 사모 (뉴저지복음장로교회)

의사소통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몸으로 말하기도 하고 눈으로도 표정으로도 때로는 아무 말하지 않고도 의사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침묵도 강한 긍정이든지 강한 부정이든지 의사를 드러내는 확실한 의사소통의 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과연 인간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악행 허가서일까? 아니, 하나님의 침묵이 실은 인간에게 임한 가장 큰 착각의 위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버린 인간, 즉,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고 침묵하실 때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당장 불로든 물로든 심판의 손을 드시지 않고 가만히 계시니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듯 스스로 왕으로 등극하여 자신의 마음에 좋을 대로 행합니다.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좋은 선택보다는 내 것을 챙기기에 혈안이 된 이기주의 선택이 생존경쟁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연적인 방식입니다. 내가 왕이니 너나없이 자존심의 거슬림이 부추기는 대로 악한 마음을 따라가니 악이 관영합니다. 죄의 결과가 부른 괴로움 넘치는 우리네 인생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당장 벌이 안 떨어지니 양심이 마비되고 아예 담대해져 살인을 밥 먹듯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없애 악에 담대해져 극악무도 포악한 마귀형상을 그 안에 충만이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정욕을 따라 살며 일으키는 무수한 갈등들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제대로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자격 없는 인생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의 기회이며 임할 심판의 경고입니다. 신자의 삶이 불신자의 삶과 차이가 있을까 냉정히 살펴봅니다. 아, 그런데 아찔합니다. 매일의 삶은 누구보다 더 세상적이나 주일에는 경건한 모습으로 헌신하기에 스스로 믿음 좋은 이로 착각하는 의인들로 가득찬 현대 교회의 실상이니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무궁한 인내심으로 참고 입을 굳게 다무시고 애통케 하는 가증스런 위선자들로 가득하지요. 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총동원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법이요” 들이대며 남을 비판하여 파당을 짓는 목소리 높이는 이들... 어려운 환경 탓으로 자신은 모두에게 받아야한다고 대우받으려는 이들... 다른 이 형편은 아랑곳없고 자기 입장만 우기는 이들... 자신이 받은 것을 준 것으로 착각해 구해주니 내 보따리 내놓라는 이들... 작은 칭찬에 부풀어 마귀 통로에 대문열어 놓는 공치사쟁이들... 교회 직분을 세상 벼슬로 착각해 교회 대소사를 주관하려 힘주는 직분자들…. 하나님의 뜻은 관심조차 없고 조금 기도하다가 원하는 것이 안보이면 기도 응답이 없다고 속단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분을 품기도 합니다. 허나 절망하고 열불을 내고 넘어지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나요? 그야말로 악에 치우쳐 본인만 망가질 뿐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질것이 아닙니다. 원통하여 쌓은 악으로 인해 악한 일들이 내게 쏟아지면 정말로 억울하지 않은가요? 백해무익한 자존심게임 내려놓고 억매이기 쉬운 죄에서 벗어나 탕자의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시는 그 분의 품으로 달려가 그 분께 억울한 사연 다 쏟아놓고 내 죄짐을 벗기를 원합니다. 스스로를 찌르고 모두를 죽이고 지옥의 상태에서 괴로움가운데 동물이하로 타락한 내면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가면 하나님이 새겨 놓으신 하나님의 형상이 내면에서 몸부림을 합니다. 생의 바닥에서 스스로를 보며 절망하고 죽음을 택하던지, 인간답게 살고픈 진솔한 소망을 붙잡고 하나님께로 스스로 돌아와 생명 길을 택하든지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스스로 자초한 극한 상황가운데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고 하나님은 오늘도 무언으로 우리를 애절하게 부르십니다. 과연 네가 피해자냐? 가해자냐? 억울하다 고소하던 마음이 잠잠해지면 주님이 굳게 침묵하실 수밖에 없도록 기막힌 모습들이 내 안에서 하나하나 보이도록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나의 고통을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으로 크게 들려지는 복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메일: heenlee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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