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이희녕 사모(뉴저지복음장로교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처음 이 말씀을 접한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경 말씀에 매료되어 올인해 성경 말씀을 한 자도 빠짐없이 내 것으로 끌어안던 대학교 2학년 때입니다. 회심한 바울의 어쩌면 극단으로 보이는 고백들이(빌3:7-14) 너무도 멋지게 보였습니다. 어찌하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바울의 모든 서신들을 통한 깊은 신앙의 진솔한 고백들에게 깊이 매료되어 ‘나도 그의 길을 따라가리라’ 바울이 바라본 같은 푯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란 말씀이 도무지 소화불량이 되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내가 죽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모든 것이 결국 내가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던가?” 질문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게 된다”는 역설을 가지고 엎드렸습니다. 내가 죽어야한다면 그럼 내가 내 삶을 다 던지고 저 멀리 외지에 선교사라도 가야한다는 말씀인가? 그 생각에 미치니 갑자기 내 삶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겁이 나고 “어머 내가 광신자가 돼가나?” 마구 혼동스러워졌습니다. “에이,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원하지 않는데 내가 싫어하고 겁내는 외지에 나를 검정치마 흰저고리 입혀 결혼도 시키시지 않고 홀로 외지로 보내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어 겨우 두려움이 현실이 될까 은근히 겁에 질린 마음이 진정이 되긴 했습니다.

하나 점차 하나님을 모르고 죄 가운데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부어주셔서 열심으로 손에 닿는 이들을 전도하며 나 자신을 구원해주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분의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도록 이 땅에 파송된 선교사임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의미하는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해 얼마나 우스꽝스런 걱정을 하고 하나님에게서 멀리 도망가려 했는지요. 말씀을 묵상해가며 점차 그 분의 깊은 마음에 눈이 떠졌습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란 고백이 결코 내게서 중과 같이 완전 속세를 버리고 머리 깍은 종교인이 되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는 세상방식의 육적인 탐욕의 방법을 버려야 자격 없는 죄인들 위해 자신의 피 한방울까지 주신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 앞으로 인도해낼 수 있기에 육적인 나는 필히 죽고 순수한 예수님의 심장이 나를 주장해야 함이 점차 이해가 되었습니다.

외지에 나가 선교사 되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실제로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보낸다 해도 도저히 감당치 못할 무능력자가 오히려 보낼까봐 두려워하다니… 떡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고 맛이 없네 있네 떠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려놓으면 놓을수록 드러나는 내 안에 숨어있는 육체의 힘의 잔재들을 따라 사는 습관이 너무도 깊은 왜곡된 자기 사랑에 뿌리를 내려 쓴뿌리들과 엉겨 주님의 순결한 신부로 섬기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임을 봅니다.

진정으로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길 소원하며 작정합니다. “아~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우리 모두 안에 주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믿음 안에 따뜻하게 어우러져 위하고 사는 행복한 모습 너무 보고 싶습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복만이 되기를 사모하며 기도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진정한 복된 소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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