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축복과 저주

이희녕 사모(뉴저지복음장로교회)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

우리는 스스로 우리 안에는 아무리 뿌리를 파내어 잘라내도 잠시 후 돌아보면 노랗게 꽃피는 잡초 민들레와 같이 죄는 아무리 잘라내도 도저히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듯 포기하고 여전히 죄에 져 넘어감을 합리화합니다. 하나 시편기자는 단호히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며 복도 저주도 다 내 몫임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결과는 좋아하지만 그 결과를 가져올 과정은 당연히 나는 할 수 없는 것으로 쉬운 길을 택합니다. 막상 쓴 열매가 맺히면 원망으로 빠지는 병든 마음을 끼고 삽니다. 하나 “아차 잘못 들어섰네.” 비록 막 달려가던 길일지라도 바른 길을 가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잘못된 길에서 멈추어 서서 내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을 확인하고 그리고 내비가 왼쪽 오른쪽 지시하는 그대로 따라가면 비록 중간에 길을 잃었다 해도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잘못 선택해서 악인의 꾀를 좇으며 죄인의 길에 서서 오만한 자리에 앉아 교만한 삶을 살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고통가운데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고 완전히 고립된 듯한 저주의 상태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허무를 절감한 영혼이 파산한 바로 자리에서 멈추어 서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께로 인생을 재조정 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 중에라도 베풀어 주신 은택을 계속 되새김질 하듯 밤낮으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도록 자신을 하나님의 곁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이 서서히 영혼 깊숙이 십자가의 은혜가 녹아 들어가며 말씀이 꿀송이 같이 달게 느껴지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전 존재에 스며들어 점차 안정을 찾게 되어갑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하여 잘되어 자신이 변화되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영혼이 감사와 기쁨으로 넘치니 입을 열면 감사와 축복이 흘러나옵니다. 이제 제대로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방향으로 마음을 향하니 더 이상 악한 양심이 이웃을 종종 고소하더라도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웃을 품는 믿음에서 나오는 주님의 사랑이 그 마음을 이끌어갑니다. 이리저리 주위에 껄끄럽던 관계들의 벽들이 점점 허물어져 내리고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마치 하나님이 감동하신 듯 막힌 듯 답답했던 상황들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기적들을 체험합니다.

예전 같으면 자신의 덕으로 돌리며 목에 힘이 들어 갈만합니다만… 이제는 압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고 잔칫상을 마련하시고 상주시는 것이라고 감격으로 고백합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울 일말의 여지가 없는데 높여주시는 하나님의 칭찬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감사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복 있는 자의 모습이며 길입니다.

결코 축복의 길과 망하는 악인의 저주의 길이 정해진 운명의 장난이 아닙니다. 사람의 일생을 꼼짝 못하도록 운명 지으신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하나 형통이 보장된 축복의 길이든 망하는 저주의 길이든 그 결과는 각자가 선택하는 대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축복도 저주도 결국은 내가 무엇을 심는가에 따라오는 열매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 축복받기를 너무도 소원합니다. 하면 고지식하게 한 마음으로 축복의 길만을 따라가면 됩니다. 육이냐? 영이냐? 내 생각대로인가? 하나님 말씀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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