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녕 사모(뉴저지복음장로교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인간의 의식구조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판단의 잣대이던 진리 사고체계가 자신의 눈이 보기에 좋을 대로 세상을 재는 허상이 잣대인 거짓 사고체계로 마음의 사고방식 시스템이 바뀐 것입니다. 생각이 거짓을 진리로 상상해 받아들인 그대로 감정, 의지가 반응을 하고 마음 판에 기억되었습니다. 자신의 벌거벗음이 수치로 보여지고 죄의식이 마음 판에 코팅되었습니다. 모든 생각의 흐름이나 감정도 의지도 상상력도 따라오는 행동들도 수치심과 죄의식의 검은 색으로 모두 모두 코팅되었습니다. 양심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나님 성품을 바로 따라가도록 도덕적인 가이드를 해주는 선한 양심위에 자신의 것이라 여겨지는 모든 것을 지키고 방어하는 목적변경으로 악한 양심이 덧입혀졌습니다. 선한 양심은 악한 양심에게 둘러싸여 그 목소리를 낸다 해도 보통은 사나운 악한 양심에게 먹히웁니다.
악한 양심은 자신의 것에 위협을 느끼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기 때문에 위기를 느낄수록 칼날과 같이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역을 하기 때문에 늘 심판을 합니다. 그래서 목소리가 자신의 법을 요구하기에 관철이 되지 않으면 분노로 대응하고 과격한 판결을 내려 파괴하고 응징하고 살인도 일말의 가책 없이 합리화하여 불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인의 모습에서 부추기는 악한 양심에 휘둘려 동생을 죽이고도 가책은 고사하고 자기 목숨만을 챙기는 극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하는 이생의 자랑의 욕구가 강할수록 조금만 원하는 것이 좌절되어도 거절감에 복수극으로 응징해야하는 마귀식 단순구조의 악한 양심은 올인 해 소진하기까지 에너지를 쏟게 몰아갑니다. 내게 죄지은 자를 응징하는 정당방위의 이름으로 거의 기계적으로 원수를 갚는 의식구조입니다.
악한 양심이 맹렬히 일을 하는 무대는 자기중심에서 보고 느끼고 판단하는 자기 의가 잣대이기 때문에 어느 상황이든 언제나 억울한 희생자의 입장에 섭니다. 그런 상황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아무리 말씀을 읽고 말씀대로 용서하려해도 화가 잔뜩 난 마음이 꼼짝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을 읽고 또 읽으며 “오호라 곤고한 자라” 통회하고 정죄하고 달래 봐도 한 번 독이 오른 악한 양심은 오히려 극도의 처단 쪽으로 외골수 일방통행으로 파국으로 몰고 갑니다. 절대로 자신이 옳다고 믿기에 모든 폭력을 동원해 응징을 해도 화가 가라앉지를 않습니다. 특별히 열등감이 강할수록 예민해진 거절감이 온 세상이 자기를 무시하고 거절하듯 상상을 키워 악한 양심을 갈고 닦은 터인지라 과대망상증, 편집증, 사이코패스 등등을 포함해 정신병의 수준에까지 자신의 인간성을 깎아 먹습니다.
자신을 몰아 세워 폐인이 될 지경까지 되어도 자신의 한계 속에서 두 손 들고 예수님께로 나아오면 받아 주십니다. 어떤 형편이든 절대 몰아세우시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파산한 탕자를 기다리고 기다리시다 맨 발로 뛰어나와 꼭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애절한 사랑입니다. 무엇으로 이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를 헤아리고 표현할 수 있을런지요. 이를 악물고 예수믿는 자들을 색출해 핍박하던 사울을 다메섹에서 드라마틱하게 하나님을 만나 진리에 눈이 뜨고 개종한 바울로 바꾸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칭하며 일생을 헌신한 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자신이 절대 옳다고 여기는 악한 양심의 활동은 저주입니다. 주 예수님의 피가 악한 양심의 목소리를 물러나게 하고 선한 양심을 불러 일으켜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신의 기막힌 모습을 보도록 해주십니다. 악한 양심이 할 말을 잃고 조용해지니 용서받은 마음이 겸손히 쉼을 얻고 마음의 평안을 입고 고백합니다. “네가 받은 내 은혜가 족하도다.” 그렇습니다.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