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녕 사모(뉴저지복음장로교회)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9:10).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과 하와가 사고 쳐 코가 쭉 빠진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라고 견딜 수없이 몰려드는 수치심과 두려움의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저들을 향하여 애타게 부르십니다. 너희들이 수치와 두려움의 죽음 앞에 서있는 것을 알고 있느냐? 하시며 죽음의 벼랑 끝에서 돌이켜 내 손을 잡아야 살 수 있다고 계속 안타깝게 외치십니다. 하나 이미 저들의 ‘눈이 변하여’ 더 이상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선악 간에 판단하는 심판자의 공포의 대상으로 그 관계가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신뢰관계의 금이 가니 의심하고 밀어내고 도망치며 무화과 잎새 옷을 주서입고 그저 몰려드는 수치심과 공포심을 모면하기에 급급합니다.
오늘도 “너는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인간이야…” 고개를 들 수 없도록 사방에서 몰려오는 ‘너는 부끄럽다’는, ’네 인생은 민폐’라는 선악과의 찌르는 정죄의 소리를 듣는 한 아담과 하와가 빠진 공포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길은 없습니다. 여전히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습니다. 자신이 옳다 그르다 하는 선악의 잣대로 의심의 눈으로 무엇을 바라보든 그 결과는 뻔합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실 리가 없어 단정 짓고 마음을 닫으니 신뢰관계가 성립되지 못합니다. 그저 마음이 불안하고 무섭습니다. 이런 깨진 관계에서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뜻으로 말씀을 하셔도 좋은 소리로 들립니다. 모든 질문에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괴로운 그 자리만 벗어나려 안간힘을 씁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시니 하나님의 소리 듣고 내가 벗어서 두려워 숨었다고 대답합니다. 그전에는 벗었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그 상태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벗은 것이 부끄럽게 느껴져 두려워 숨었다하니 누가 네게 벗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알려주었냐고? 다시금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분명히 그런 아담도 기뻐하는 아들인 자신의 마음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그렇게 되었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남자답게 실수를 인정하면 될 것을 한 술 더 떠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가 내게 열매를 주어 먹었노라고 여자에게, 나아가 하나님에게 책임전가를 함으로 자신이 불순종한 죄를 합리화하고 책임회피를 하는 못난 남자 아담의 모습입니다.
어찌보면 책임전가로 회피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에 성공한 듯 보였는지? 하와도 아담의 길을 따라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다고 뱀의 탓을 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눈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건만 그래도 하는 데까지 튀는 불똥을 피해보려 앞가림에 급급한 하와의 모습가운데 요즘 세상의 우리에게서도 똑같은 문제해결방식을 보게 됩니다. 책임회피도 모자라 책임 전가에 빠져나가기에 올인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복들을 제 손으로 하나하나 저주의 상태인 마귀 닮은꼴인 죽음의 상태로 바꾸어내는 죽음에 이르는 죄입니다. 이렇게 의심으로 시작해서 밀고 밀려나고 점점 아름다운 관계를 제 손으로 헐어내며 더 더욱 캄캄한 지옥의 나락을 향해 떨어지는 어리석은 죄인들이건만 이런 죄인들일지라도 개의치 않으시고 초심대로 초지일관 우리들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아니 죄의 나락에 깊이 떨어진 아이일수록 가슴이 아파서 아이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아이를 살리기로 작정하십니다. 죄없는 양을 죽여 그 가죽으로 손수 옷을 해 입혀 불안해 안절부절하는 저들을 가려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아들을 죄인을 가려주시기 위해 십자가위에 내어주신 그 절박한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