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아무리 가려도 부끄러움이 점점 커져만 가는 무화과나무 잎새옷

이희녕 사모(뉴저지복음장로교회)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앗더라”(창3:7). 선악과를 한 입 무는 순간 부끄러움, 죄의식, 벌받을 것에 대한 무서움이 하와에게 몰려듭니다. 죄는 혼자 짓지 않습니다. 상대방과 함께 내가 가진 기쁨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선한 마음입니다. 하나 혼자 벌 받기가 무서워서 남을 끌어들이는 것은 남을 내 방패막이로 삼는 마귀의 악한 마음입니다. 사고치고 겁이 덜컥 나니 그제서야 생각이 난 남편에게 달려가 아무 일도 없는 척 가장하며 자신이 유혹받는 그대로 “자기야~~ 먹어 봐. 맛이 죽인다니까~~” 선악과를 내밉니다. 선악과를 아내에게서 받아들며 하와의 탐심에 마음을 합하며 생각합니다. “뭐야 하나님이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더니? 하와가 안 죽었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궁금했었는데 하나님말씀이 거짓말이잖아” 겉으로 보이는 하와의 살아있는 육체의 모습만 보고 담대히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아담은 덥석 선악과를 받아먹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것이 부끄러움으로 보이고 그 부끄러운 수치심을 가리려 무화과 잎새로 치마를 해서 입었다고 기록합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어감은 무언가 새로운 세계가 열린 긍정적인 것 같은데 자신의 벗은 모습이 부끄러움이 느껴져 자신 손에 닿는 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무언가 이상합니다. 해서는 안되는 유혹에 발을 디뎠을 때 “아뿔싸” 눈이 캄캄해져서 수치를 우선 감추고 숨는 모습입니다. 마약을 파는 이들의 유혹에 넘어가 마약중독에 빠진 자신의 모습이 자랑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아차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섰구나! 실상에 눈이 뜨면 뛰쳐나가 살 길을 찾기 보다는 대부분 더 심한 중독으로 빠져들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중독의 양상은 유혹받음의 과정이나 결과도 다 똑같은 마귀의 인간 파괴 작전에 걸려들은 것입니다. 마약이 잠시 주는 맛에 감각이 눈이 떠 알면서도 끌려들어가는 그 맥의 죄의 잠시의 감칠맛에 코가 끼여 점점 더 깊은 죄악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어리석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는 분명히 독약이라고 경고하셨지만 인간은 경고를 무시하고 독약을 마셨는데 하나님 탓이라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선악과에 대한 경고는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나는 ‘네가 생명을 택하길 바란다’고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의 자리를 주시고 많은 능력을 부여받은 자답게 자신 안에 심어두신 것을 귀한 것으로 인식하고 활용하는 자격으로 명실공히 갖추어 가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배려입니다.

문제가 터지기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상태이었는지 감각이 없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어 생사를 넘나들며 생명의 소중함, 건강의 소중함이 크게 다가오고, 물질에 문제가 터지면 의식주에 어려움 없음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등등 당연하다 여기던 것에 이상이 생겨야 평상시에 아무런 감각 없이 당연시하던 모든 일들이 복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주어지니 감사에 무감각하던 아담과 하와에게 부끄러움이 없던 상태가 얼마나 행복한 상태이었는지? 아무리 가리고 숨고 숨겨도 올라오는 수치심에 온갖 두려움의 소리가 커지고 이런 마음으로 떨어지도록 유혹한 아내 원망에 심지어 하나님원망에 삼키워진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나님이 의미하신 죽음은 직접적으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무화과 잎새로 옷을 해입고도 모자라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나무 사이에 숨어 안절부절못하는 둘을 보며 하나님은 물론 저들의 모든 것을 아시며 “아담아 아담아”하고 안타까이 그 이름을 부르십니다. 완전해진 연후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무지개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탕자처럼 방황할 때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더러운 모습 그대로 나옴이 우리가 살아날 은혜의 살 길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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